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32) / 몸은 허물어진다-박설희의 ‘완강한, 몸‘
완강한, 몸
박설희
십일 년 된 묘를 개장하기로 한다
헐벗은 봉분을 연다
흙을 물고 쓰러지는, 그물 같은 뿌리들
검고 촉촉한 집……
그 속에서 한 점 한 점
벗어버리려 애쓰는 아버지
물로 풀어져 눈알이 흘러간다
풀로 솟아난 손가락이 허공의 급소를 더듬는다
벌레로 기어 다니는 내장, 꿈틀꿈틀
곰팡이 슨 채로
거의 육탈이 안 된 다리 한 짝
걸어가야 할 많은 길들이 남아 있다는 걸까
짓는 데 십수 년
그때 이룬 몸을 아직 허물지 못한 아버지
과제를 제대로 해내지 못한 아이처럼
풀이 죽은 모습이다
어떤 간섭도 싫다는 듯
저 혼자 생성되고 무화되는
완강한, 몸
아버지가 남긴 몸을 이끌고
나는 덜그덕거리며 하산한다
대지와 하늘이 만나는 산등성이 부근
진달래가 발진처럼 돋아나 있다
―『실천문학』(2004. 가을)
<해설>
화자는 십일 년 된 아버지의 묘를 개장키로 하고는 헐벗은 봉분을 열었다. 눈알은 물로 풀어져 흘러가고 없다. 풀로 솟아난 손가락이 허공의 급소를 더듬고 있다. 아아, 내장이 있던 몸통에는 꿈틀꿈틀 벌레들이 기어 다닌다. 화자의 눈에 확 띈 것이 있었으니, “곰팡이 슨 채로/ 거의 육탈이 안 된 다리 한 짝”이다. 이 다리 한 짝에 대한 생각이 시를 이루었다. 다른 것들은 자연으로 돌아갔지만 다리 한 짝이 육탈이 안 된 이유를 시인은 “걸어가야 할 길들이 남아 있었다”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제2연이 씌어지고, 다리 한 짝은 곧 “완강한, 몸”을 대변한다.
대지와 하늘이 만나는 산등성이 부근에 왜 진달래가 발진처럼 돋아나 있는 것일까. 생과 사의 거리가 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죽은 자 또한 몸을 허무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림을 알고 시인이 충격을 받았기에 그렇게 표현해본 것이 아닐까. 진달래 또한 인간의 그 완강한 몸처럼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봄이면 다시 발진처럼 온 산야에 번지는 것이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