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42) / 슬픔의 나라-김민의 ‘심부름하는 아이’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42) / 슬픔의 나라-김민의 ‘심부름하는 아이’
  •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09.04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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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42) / 슬픔의 나라-김민의 ‘심부름하는 아이’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42) / 슬픔의 나라-김민의 ‘심부름하는 아이’

  심부름하는 아이 

  김민 


  1
  텃밭 사이 지름길로 오다가 발을 빠뜨렸지 뭐예요
  그래서 그냥 심어 놓고 왔어요

  그래서 늦었구나, 얘야
  솥뚜껑 좀 닫아 주지 않겠니?

  예, 알겠어요
  무엇이든 닫아 버리는 일은 제 몫이니까요
  그런데 뚜껑은 어디 있어요?

  곰쥐 떼가 몰려온다는구나

  안에 들은 이건 대체 뭐죠?
  처음 맡아 보는 냄새예요

  너의 탯줄로 만든 순대란다
  맛 좀 봐주련?
  칼을 가져오려무나

  칼은 제가 계속 가지고 있으면 안 될까요?
  웃자란 발가락을 솎아내야 하거든요
  참, 그것들도 같이 찌면 좋겠네요

  이제부터는 네가 찜솥을 맡아도 되겠구나
  뚜껑은 찾았니, 얘야

  이제 뚜껑은 찾을 필요 없어요
  제 몸을 통째로 넣을 거니까요

  곰쥐 떼가 몰려오고 있질 않니

  곰쥐는 저처럼 질긴 상처는 먹지 않는대요
  그러니 아무 걱정 마세요
  어머니

  2
  날이 궂으니 솜틀집에 눈물샘 좀 맡기고 오려무나

  -『유리구슬마다 꿈으로 서다』(문학세계사, 2017)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42) / 슬픔의 나라-김민의 ‘심부름하는 아이’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해설>

  ‘2019년 구상솟대문학상’ 당선자는 이 시를 쓴 김민 시인이다. 구상 시인이 말년에 가족들 모르게 한국장애인문인협회에 쾌척한 2억원이 이 상의 제정과 『솟대문학』 발간의 밑거름이 되었다. 김민 시인은 뇌성마비를 앓았고 청각장애도 있다. 고 김수영 시인이 큰아버지다.  
  어머니와 심부름하는 아이와의 대화로 이루어진 시다. 텃밭에 빠뜨린 발을 그냥 심어 놓고 왔다는 의미심장한 비유로 시작하는 이 시는 시종일관 환상적이고 우울한 정서가 이어진다. 솥에 넣고 삶고 있는 것은 ‘너의 탯줄로 만든 순대’다. 칼로 ‘웃자란 발가락’들을 솎아낸다는 표현도 섬뜩하지만 곰쥐 떼가 몰려오고 있는 상황이 섬뜩함을 배가시킨다. 곰쥐는 집쥐보다 몸이 가늘고 귓바퀴가 크고 몸 색깔은 검고 동작이 매우 빠르다. 심부름하는 아이는 어머니에게 “곰쥐는 저처럼 질긴 상처는 먹지 않는대요/ 그러니 아무 걱정 마세요”라고 말한다. 아아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 2번 시는 지금까지보다 더욱 의미심장하다. 이런 말들을 예사로 하는 아이로 인해 어머니가 그간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딱 한 행으로 다 말해주고 있다. 
  ‘2019년 구상솟대문학상’ 당선작에 포함된 이 시는 “생명 탄생의 비극성을 극복하려는 피눈물 나는 노력이 엿보인다. 어머니와의 대화체로 진행됨으로써 우화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섬뜩한 충격과 뻐근한 감동을 주는 그의 시가 범상치 않다.”는 평을 들었다. 시상식이 10월 12일 오후 2시 대학로 이음센터 이음홀에서 있을 예정인데 가볼 생각이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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