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 100주년 공동 심포지엄] 한국 정치사에 발을 맞춘 한국 문예지의 100년 역사 (1)
[문예지 100주년 공동 심포지엄] 한국 정치사에 발을 맞춘 한국 문예지의 100년 역사 (1)
  •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09.18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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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사에 발을 맞춘 한국 문예지의 100년 역사
  
이승하(시인ㆍ중앙대 교수)

이승하 시인 [사진 = 김보관 기자]

*이 글을 쓰는 데 참고로 한 책은 아래와 같다. 애당초 발표했던 발제문에는 각주를 붙여 일일이 출처를 밝혔지만 각주를 달 수 없는 인터넷 환경이라 책명만 서두에 밝혀둔다.

  김근수, 『한국잡지사연구』, 한국학연구소, 1992. 
  정진석 외, 『한국 잡지 100년』, 사단법인 한국잡지협회, 1995. 
  최덕교 편저, 『한국잡지백년』 1, 2, 3, 현암사, 2005(재판).

 

  1. 최초의 문예지 『創造』 등장의 의의

  한국 잡지의 역사는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2년 1월에 나온 『코리안 리포지토리 The Korean Repository』를 최초의 잡지로 보는 사람도 있고 1896년 2월에 나온 일본 유학생들이 낸 『친목회회보』를, 1896년 11월에 나온 『대죠선독립협회회보』를 최초의 잡지로 꼽기도 한다. 그렇다면 문예지의 역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시ㆍ소설ㆍ평론 따위 문예 작품을 주로 싣는 잡지”라는 사전적 정의에 입각해 살펴본다면 ‘최초’의 영예는 1919년 2월 1일자로 창간된 문학동인지 『창조』가 차지하게 된다. 3ㆍ1만세운동을 앞두고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작성한 2ㆍ8독립선언서가 나오기 일주일 전이었다. 『창조』는 김동인ㆍ주요한ㆍ전영택 등이 중심이 되어 도쿄에서 편집하였고 요코하마에서 인쇄ㆍ발간하였다. 창간호의 제책은 재단하지 않고 접은 채로 제본하여, 읽는 사람이 페이퍼 나이프로 손수 자르면서 펼쳐보는 이른바 ‘프랑스장(裝)’으로 멋을 부렸다. 창간 멤버인 전영택은 창간 당시의 일을 『사상계』 지면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때는 1918년 가을 일본 동경 유학시절, 11월쯤 되리라고 생각한다. 하루 저녁은 요한과 동인 두 사람이 내가 있는 청산학원 기숙사로 찾아왔다. 뜻밖의 일이라 ‘웬일이냐’고 물어보며 자못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리 문예잡지 합시다.” “그럽시다.”
  파탈하고 성급한 동인이 먼저 말을 꺼내고 나도 덮어놓고 찬성을 한 결과 『창조』가 나오게 된 것이다.(하략)

  『창조』는 그때까지의 계몽주의적 성격을 밀어내고, 완전한 구어체의 문장을 쓰면서, 현대 문학사조의 새로운 영역인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 문학을 개척하는 데 크게 공헌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창간호의 첫 면에 실린 시가 주요한의 「불놀이」다. 최남선이 1908년 잡지 『소년』 창간호에 발표한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신체시의 기점이 된다면 「불놀이」는 자유시의 출발점이다. 주요한 스스로 이 시를 쓰게 된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창조』에 실은 「불놀이」 등 몇 편 시의) 내용은 불란서 및 일본 현대 작가의 영향을 받아 외래적 기분이 많았고, 그 형식도 역시 아주 격을 깨뜨린 자유시의 형식이었습니다. 자유시라는 형식으로 말하면 당시 주로 불란서 상징파의 주장으로, 고래로 내려오던 작법과 타입을 폐하고 작자의 자연스런 리듬에 맞추어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김동인도 「조선근대소설고」라는 글에서 선배 작가 이광수를 맹렬히 비판하면서 자신의 소설가적 입지를 모색한다. 김동인이 『창조』 창간호에 발표한 「약한 자의 슬픔」은 한국 사실주의 소설 혹은 자연주의 소설의 최초 작품으로 손꼽힌다. 

  종래의 권선징악과 춘원의 권선징악의 사이에는 오십보 백보의 차이밖에 없다. 종래의 습관이며 풍속의 불비(不備)된 점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옳은 일이되, 개선방책을 제시하는 것은 소설의 타락을 뜻함이다. 소설가는 인생의 회화는 될지언정 그 범위를 넘어서서 사회교화기관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될 수도 없는 것이다.

  김동인은 춘원의 계몽주의가 낡은 것이라고 비판하기는 했지만 그를 무시할 수 없어 2호부터 동인으로 받아들인다. 일본에서 2집까지 내고 3호부터는 서울에서 9집까지 낸다. 9권의 『창조』 문학동인지에 시 74편, 소설 17편, 희곡 3편, 평론 17편, 번역물 52편, 수필 20편 등이 발표되었으니 최초의 동인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셈이다.

 

  2. 일제의 탄압을 이겨나간 1920년대

  일제가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1910년부터 3ㆍ1운동이 발발한 1919년까지 많은  신문과 잡지가 폐간되었다. 예컨대 1917년 4월에 나온 반연간지 조선문예는 2호로, 1918년 9월에 나온 주간지 태서문예신보는 16호로 종간된다. 자체적인 이유도 있었고 외부적인 사정도 있었다. 1910년대 10년 동안 창간된 잡지가 30종이 넘었는데 종교단체에서 내는 것이 많았다. 그나마 종교단체였기에 창간호는 내는 것이 가능했는데 포교와 소식지를 겸한 것이라 언론의 기능을 하기는 어려웠다. 

   1910년 『시조』 『천도교회월보』『보중친목회보』
   1911년 『시천교월보』
   1912년 『조선불교월보』『학계보』
   1913년 『경학원잡지』『붉은 져고리』『신문계』『아이들보이』『해동불보』
   1914년 『근대사조』『새별』『청춘』『학지광』『공보』 
   1915년 『법학계』『불교진흥회월보』
   1916년 『조선불교계』
   1917년 『반도시론』『여자계』『조선불교총보』『조선문예』
   1918년 『태서문예신보』
   1919년 『신한청년』『창조』『학우』『녹성』『삼광』『서광』『서울』『신청년』

  이 가운데 문예지의 기능을 한 것은 『청춘』과 『학지광』 및 『태서문예신보』의 학예면이었다. 그런데 1919년에 종교적 색채를 띠지 않은 잡지가 8종이나 나온 것은 그만큼 일제가 우리의 숨통을 막아 왔다는 것을 증명한다. 3ㆍ1운동 이전까지는 언론이 부재하니 자연히 문화가 말살되는 탄압 일변도의 정책이 이어졌다. 만세운동은 10년 세월의 억누름에 대한 격렬한 반대의사 표명이었다. 33인 민족대표가 이끌었다기보다는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났으며, 사망자 수가 7,000명에 달하는 거국적인 독립운동이었다. 이에 놀란 일제는 1919년 8월에 사이코 마코토[齊藤 實]를 새 총독으로 파견하면서 지난 10년 동안 실시했던 무단정치를 버리고 문화정치로 정책의 기조를 바꾸기로 한다. 조선일보ㆍ동아일보ㆍ시대일보가 창간되었고 이어서 중외일보ㆍ중앙일보ㆍ조선중앙일보도 창간되어 과거와 같은 탄압 일변도의 정책은 사라진 듯했다. 잡지는 『개벽』(1920), 『신천지』(1921), 『신생활』(1922), 『동명』(1922), 『조선지광』(1922), 『동광』(1926), 『현대평론』(1927), 『신동아』(1931), 『중앙』(1933), 『조광』(1935) 등이 창간되어 문학작품들이 앞을 다투어 개재됨으로써 창작의 물꼬가 트이게 되었다. 
  『창조』에 이어 나온 문학동인지는 『폐허』『장미촌』『백조』『금성』이다. 말 그대로 동인들이 모여서 펴낸 동인지이면서 문학잡지를 겸하고 있었다. 
  『폐허』는 1920년 7월에 창간되어 2호로 종간되었다. 창간 동인은 김억ㆍ남궁벽ㆍ민태원ㆍ염상섭ㆍ오상순ㆍ황석우 등 12명이다. 모두 우리 근대 문학사 초기의 대가들이다. “우리 조선은 황량한 폐허의 조선이요, 우리 시대는 비통한 번민의 시대이다.”로 시작되는 오상순의 시론(時論) 때문인지 폐허의 문학적인 경향을 흔히 퇴폐주의라고 하지만 모든 작품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낭만주의ㆍ허무주의ㆍ상징주의ㆍ자연주의 등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황석우가 주동이 되어 만든 최초의 시 동인지 『장미촌』은 1921년 5월에 창간되었다. 동인은 황석우ㆍ변영로ㆍ노자영ㆍ박종화ㆍ박영희ㆍ오상순 등인데 경제적인 문제와 동인의 결속력 부재로 창간호가 종간호가 되었다. 
  1922년 1월에 창간된 『백조』는 제3호를 내고 종간되기는 했지만 일제치하 젊은 문학도들의 유미적이고 낭만적인 경향을 띠고 있어 동인지로서의 성격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와 홍사용의 「나는 왕이로소이다」, 박영희의 「꿈의 나라로」, 박종화의 「흑방비곡」「사의 예찬」 등이 실려 있었기 때문일 터인데 소설은 나도향의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 현진건의 「할머니의 죽음」, 박종화의 「목매는 여자」 등이 낭만적 경향을 보여주었다. 
  1926년 2월에 창간된 『문예운동』, 1927년 11월에 창간된 『예술운동』, 1929년 5월에 창간된 『조선문예』는 카프와 다 관계가 있는 문예지였다. 3호를 낸 『문예운동』의 필진 김기진ㆍ이기영ㆍ최서해ㆍ조명희ㆍ김복진 등 대다수가 카프의 발기인이 된다. 
  『예술운동』은 카프의 기관지인데 검열문제로 서울에서 발행을 못하고 동경에서 발행하였다. 박영희의 논문 「무산계급 문예운동의 정치적 역할」, 이북만의 논문 「예술운동의 방향전환론은 과연 진정한 방향전환론이었던가?」, 임화의 시, 송영의 보고서 등이 실렸다. 
  『조선문예』는 박영희가 주축 멤버였다. 송영의 희곡, 김기진의 문예시평(「단편서사시의 길로」), 한설야의 수필, 임화의 시 등이 실렸다. 
  이들 세 문예지가 계속 발간되지 못한 것은 일제가 카프의 회원을 1931년, 1934년 두 차례에 걸쳐 대대적으로 검거함으로써 사회주의문학 노선이 조선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탄압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이광수가 주재하고 방인근이 자금을 댄 『조선문단』이 1924년 10월 1일자로 창간된다. 그때까지 나온 문예지는 10명 이내의 문학청년들이 의기투합해서 만들어낸 동인지 성격이었다. 『조선문단』은 범 문단적인 문예지로서 순수문학 내지는 민족문학을 표방했지만 김기진의 「문예사상과 사회사상」과 박영희의 「문예비평의 형식파와 맑스주의」 같은 평론도 실어 균형감각을 지녀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초판 1,500부가 매진되어 새로 1,500부를 찍었는데 이것도 매진될 만큼 인기를 누렸다. 제1〜4호는 이광수가 주재했지만 물주는 방인근이었다. 제5〜18호는 방인근이 직접 주재했으며, 이후 재정난으로 휴간했다가 1927년 1월에 속간했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다시 휴간했다가 1935년 2월 속간해 1936년 6월까지 통권 26호를 냈다. 『조선문단』에서부터 비로소 동인지의 성격을 버리고 문학잡지의 성격을 제대로 보여주게 된다. 
  『조선문단』은 더 이어갈 수 있었는데 방인근이 술과 기생에 빠져 재산을 탕진, 제작비를 댈 수 없게 됨으로써 발간이 중단되었다. 『조선문단』은 신인 추천제가 있어서 최서해ㆍ채만식ㆍ박화성ㆍ안수길ㆍ계용묵ㆍ한설야 등의 작가가 이곳에서 등단했다. 김동인의 「감자」, 전영택의 「화수분」, 현진건의 「B사감과 러브레터」, 최서해의 「탈출기」, 나도향의 「물레방아」가 『조선문단』에 실렸다. 유치환의 시 「깃발」과 최남선의 기행문 「금강예찬」, 나도향의 수필 「그믐달」의 발표지면도 『조선문단』이었다. 즉, 1920년대 중반부터 30년대 중반까지 10년은 카프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조선문단』의 시대이기도 했다. 『예술운동』 등이 사상을 앞세운 평론을 위주로 실을 때 『조선문단』은 시와 소설작품 중심으로 편집하여 우리 문학을 지켜갔던 것이다. 

 

  3. 1930년대의 마지막 영광 『文章』과 『人文評論』

  『조선문단』이 사라지자 이를 대체할 문예지가 나오기를 다들 갈망했는데 이에 부응한 것이 『문장』이다. 1939년 2월 1일자로 창간하여 1941년 4월 통권 26호까지 나왔다. 편집주간은 소설가 이태준이었다. 『인문평론』은 1939년 10월 1일자로 창간되어 1941년 4월 통권 16호까지 나왔다. 편집주간은 문학평론가 최재서였다. 『문장』이 창작품을 주로 실었던 데 반해 『인문평론』은 평론 게재와 해외문학 소개에 중점을 두었다. 쌍벽을 이루었던 두 문예지 모두 같은 시기에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다. 왜 일제는 이 두 문예지의 발간을 정지시켰던 것일까? 역사 연표를 살펴보니 일제는 1936년부터 우리 민족의 말과 정신을 말살시켜 나갔던 것인데, 두 문예지가 우리말과 얼을 지키는 파수꾼이었기 때문이다.
  1936년 1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사상계(思想係)가 설치되었다. 모든 책과 신문에 실리는 글을 검열하겠다는 뜻이었다. 그해 8월에 ‘조선불온문서 임시취제령’이, 12월에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이 공포되었다. 일제에 반대하는 글을 쓴 사람, 행동을 한 사람을 영장 없이 바로 체포ㆍ구금하여 형을 살게 할 수 있었다. 1937년 3월에 국어상용령을 반포했는데 이로써 각급 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은 폐지되었고 모든 과목을 일본어로만 가르치는 것이 법제화되었다. 그래서 조선에 와 있는 일본인 교사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해 6월에 ‘수양동우회사건’으로 181명이 구속되었고 7월에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10월에는 총독부에서 ‘황국 신민의 서사’를 제정하여 모든 학교와 관공서, 공장 등에서 조회와 각종 집회 때 낭송할 것을 강요하였다. 아동용과 일반용 두 종류가 있었다. 아동용은 “나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다. 나는 마음을 합해 천황폐하께 충의를 다한다. 나는 인고(忍苦)ㆍ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된다.”고 되어 있다. 일반용은 “우리는 황국신민이며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하자. 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信愛)ㆍ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자.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ㆍ단련의 힘을 키워서 황도를 선양하자.”고 되어 있다.
  1938년 2월 ‘조선육군 지원병령’이 공포되었다. 이름은 ‘지원’이었지만 강제징집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서 예컨대 형제가 3인이면 1명은 군대에 가야만 했다. 16, 17세부터 30대 초반까지는 신체에 이상이 없으면 징병 대상이 되었다. 학생이면 징병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원입대를 하라고 이광수ㆍ최남선 등은 국내는 물론 일본에까지 가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입대를 독려하였다. 
  3월에 신사참배를 거부한 일부 학생이 자퇴하여 귀향하자 일제는 평양의 숭실학교를 폐교하였다. 5월에는 ‘흥업구락부사건’으로 100여명이 검거된다. 7월에는 모든 학교의 교원이 군복을 입도록 했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강도가 훨씬 센 ‘국민징용령’을 반포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다. 일본으로 가는 배는 창씨를 한 사람만 탈 수 있어서 이때 이후 일본 유학생은 100% 일본식 성씨로 바꿔야만 했다. 
  1940년 8월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되었다. 10월에는 징병과 징용을 독려하고 전쟁 물자를 후원하는 ‘국민총력연맹’이 결성되었다. 1941년 3월에 ‘사상범 예비구금령’이 공포되어 반일사상을 갖고 있다고 의심만 되어도 구속이 가능해졌다. 8월에는 ‘농산물 공출제도’가 시행되었다. 12월 8일에 진주만의 미군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문장』 26호와 『인문평론』 16호가 이와 같은 한글말살정책의 불화살과 사상검열의 그물망을 뚫고 간행되었다는 것은 기적적인 일이었다. 
  『문장』의 창간호 머리말을 보면 일본에 문장으로 보국하겠다고 충성 맹세를 하고 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문예지 발간을 허락받을 수 없었기에 한 고육책이었지만 그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이제 동아(東亞)의 천지는 미증유의 대전환기에 들어 있다. 태양과 같은 일시동인(一視同仁)의 황국정신을 동아 대륙에서 긴 밤을 몰아내는 찬란한 아침에 있다. 문필로 직분을 삼는 자, 우물 안 같은 서재의 천장만 쳐다보고서야 어찌 민중의 이목(耳目)된 위치를 유지할 것인가. 모름지기 필봉을 무기삼아 시국에 동원하는 열의가 없어선 안 될 것이다.

  “태양과 같은 일시동인의 황국정신”이란 천황이라는 태양 같은 존재가 일본국민은 물론 조선인들에게도 빛을 골고루 뿌려 사랑해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자는 뜻이다. 일제의 눈치를 보면서 굴욕적인 머리말을 억지로 실었지만 5일 만에 초판이 매진되는 성황 속에 『문장』은 이 땅 문예지의 긍지를 지켜 나갔다. 통권 26호 중 제7호는 32명 소설가의 소설로만, 제24호는 34명 소설가의 소설로만 싣는 특집호로 만들었다. 그 당시 이 땅의 중요 소설가가 총망라된 특집이었다. 추천제를 통해 좋은 신인을 문단에 내보낸 것도 『문장』의 공이었다. 선고위원 이태준이 추천한 소설가는 최태응ㆍ곽하신ㆍ임옥인ㆍ지하련ㆍ허민ㆍ임서하 등이었고 선고위원 정지용이 추천한 시인은 훗날 『청록집』을 내는 조지훈ㆍ박두진ㆍ박목월과 김종한ㆍ이한직ㆍ박남수 등이었다.
  『문장』은 고전문학의 주해(註解)와 연구논문, 희귀자료를 적지 않게 발굴ㆍ게재했다. 그중 연재된 것은 이병기 주해 『한중록』(11회), 이병기 주해 『인현왕후전』(6회), 박지원 원작 이윤재 초역 『도강록』(10회), 양주동의 「近古東西奇文選」(9회), 이희승의 「조선문학연구」(3회), 이태준의 「문장강화」(9회) 등이다. 광복 후 박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묶은 『문장강화』는 6만 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한다. 문예지를 내는 출판사에서 단행본을 내는 전통을 마련한 것도 문장사였는데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시초였다. 2년 2개월 동안 26호를 찍으면서 소설 182편, 시 172편, 시조 25편, 국문학 관련 글 35편, 문학평론과 이론 187편, 수필 287편, 기타 172편이 실렸다. 
  『인문평론』은 16호를 내는 동안 문학평론 70편, 시 69편, 소설 48편, 희곡 7편, 문예시평 다수를 수록했다. 경성제국대학 문과를 졸업한 뒤 친일파로 돌아선 최재서 때문에 매호 권두언은 친일 발언 일색이었다. 최재서는 문학정신의 국민적 전환을 촉구하는 「전환기의 문화이론」(1941. 2), 「문학정신의 전환」(1941. 4)을 발표하면서 일제에 과잉충성을 하였다. 하지만 이용악의 「오랑캐꽃」과 이육사의 「청포도」의 발표지면이 『인문평론』이기도 했다. 
  『인문평론』은 특집호가 많았다. 제2호 ‘교양론 및 프로이드’ 특집, 제4호 ‘현대 美’ 특집, 제6호 ‘현대와 인간문제’ 특집, 제7호 ‘소설론’ 특집, 제8호 ‘문학과 직업문제’ 특집, 제9호 ‘동양문학의 재반성’ 특집, 제11호 ‘녹음 수필’ 특집, 제12호 ‘신인 창작’ 특집, 제14호 ‘해외단편소설’ 특집, 제16호 ‘희곡’ 특집 등이었다. 노벨문학상 작가선 난을 만들어 아나톨 프랑스ㆍ펄 벅ㆍ헨리크 셴키비치ㆍ토마스 만ㆍ싱클레어 루이스ㆍ젤마 라겔뢰프의 작품을 소개했고 제2호 ‘불란서 소설의 신구세대’, 제4호 ‘아메리카 소설의 동향’, 제11호 ‘심리묘사와 성격묘사’, 제13호 ‘구라파문학의 장래’ 등을 중점적으로 소개함으로써 우리 문학인의 시야를 넓히는 데 공헌했다. 임화의 「조선신문학사」가 4회 동안 연재되었고 고정난인 김기림의 「문예사전」, 김남천의 「명저해설」, 최재서의 「신간평」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1939년 1월 1일자로 창간된 대중 종합잡지로 『신세기』라는 것이 있었다. 유명인사들의 근황을 소개하고 인터뷰 기사를 싣고 오락거리를 안내하는 대중지로서 큰 인기를 얻었다. 일제는 1941년이 되자 『문장』과 『인문평론』과 『신세기』를 지목, 통폐합하여 절반은 한글로 절반은 일어로 찍으라고 강요했다. 이에 대해 『문장』과 『신세기』는 자진폐간을 선언했고 『인문평론』은 제호를 바꿀 테니 계속 낼 수 있게 해달라고 총독부에 간청하여 나온 것이 『국민문학』이다. 
  1930년대의 중요 문예지 10개를 간단히 소개한다.
  카프문학 전성시대에 우리 시의 순수성을 지켜낸 『시문학』은 박용철이 사재를 털어 발간한 것인데 김영랑을 발굴해 알리는 큰 역할을 했다. 1930년 3월에 창간하여 통권 3호를 냈다. 박용철은 종합문예지를 지향한 『문예월간』도 1931년 1월에 창간해 통권 4호를 냈다. 김진섭ㆍ유진오ㆍ이은상ㆍ이하윤ㆍ이헌구ㆍ함대훈 등이 주요 필자였다. 
  『시원(詩苑)』은 1935년 2월에 창간된 시 전문지로 5호까지 나왔다. 일본 릿쿄대학 철학부를 졸업하고 온 오일도가 발행인 겸 편집인이었다. 1936년 11월에는 혜화전문 학생이었던 서정주가 주재하여 시 전문지가 나왔으니 『시인부락』이었다. 김달진ㆍ김동리ㆍ여상현ㆍ오장환ㆍ함형수 등의 작품을 받아서 냈는데 제2집을 내고는 문을 닫았다. 통권 21권까지 낸 『신인문학』이 있었다. 1934년 7월부터 1936년 9월까지 나온 『신인문학』의 발행인은 노자영이었다. 통권 6호로 종간된 『삼사문학』은 1934년에 창간되었다고 붙여진 제호인데 신백수ㆍ정현웅ㆍ조풍연이 주축 멤버였다. 
  문학을 위주로 하여 연극ㆍ영화ㆍ음악ㆍ미술을 아우른 종합예술지를 표방한 『청색지(靑色紙)』는 1938년 6월에 창간해 1940년 2월에 통권 4호를 내고 종간하였다. 편집인 겸 발행인이 화가 구본웅으로 친구 이상의 소설 「환상기」, 시 「正式」을 유작으로 창간호에 실었다. 창간호에는 김남천의 소설, 임화의 시, 이원조의 수필도 실렸다. 
  1937년 11월 10일이 발행일인 시 동인지 『자오선』은 창간호밖에 나오지 못했지만 그 당시 한국 시단의 대표주자인 오장환ㆍ이육사ㆍ김광균ㆍ신석정ㆍ함형수ㆍ서정주ㆍ윤곤강ㆍ정호승(鄭昊昇, 1916〜?)ㆍ여상현ㆍ이상의 시가 실려 있다. 
  압록강 연안의 국경마을 중강진에서 제8집까지 나온 시 전문지 『시건설』이 있었다. 궁벽한 지방에서 나온 시 전문지였지만 유치환ㆍ서정주ㆍ박남수ㆍ장만영ㆍ신석정ㆍ모윤숙ㆍ윤곤강ㆍ김광섭ㆍ안용만 등 전국을 망라한 시인들의 시가 실렸다. 1936년 11월에 창간호가, 1940년 6월에 종간호가 나왔다. 
  일본에서 살아간 조선인들의 손에 의해 2권의 동인지가 나왔으니 『순문예』와 『業』이다. 다 창간호밖에 내지 못했다. 『순문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론> 「詩」(김광섭)
  <번역시> 「꿀벌」(발레리, 이종길 역)
            「바다의 미풍」(말라르메, 이종길 역)
  <시> 「두메산골」(이용악)
        「까치」 「가을 느티나무」(조원환)
        「승리의 네안」(R)
  <평론> 「순수문학론」(안함광)    
  <소설> 「병실」(김영수)
 
  『순문예』의 발행소는 이종길의 집인 ‘東京 本鄕區 眞砂町 25 眞成館’이었다. 『業』은 일본에 유학 중이던 윤봉주가 김병길ㆍ김희선ㆍ문성빈ㆍ장세무ㆍ탁시연 등을 끌어들여 1940년 6월에 발간한 동인지로서 발행소는 ‘東京 神田區 猿樂町 2-4 獎學社’였다. 일제 강점기인 1939년과 1940년에 도쿄에서 한글로 된 문학동인지가 나왔다는 것은 작품과 양과 질을 떠나서 중대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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