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아포리즘, 애너그램으로 만나는 시 세계! 정끝별 시집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인터뷰] 아포리즘, 애너그램으로 만나는 시 세계! 정끝별 시집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 김보관 기자
  • 승인 2019.09.18 21:22
  • 댓글 0
  • 조회수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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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문학은 움직이는 것, 시대에 맞춰 변해야...”
시집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를 읽는 정끝별 시인 [사진 = 김보관 기자]

출생신고서에 등재한 내 이름이 이 별의 별명이자 병명이 되리란 걸 아버지는 아셨을까

노을이 구름을 지날 때였고 바다에 산호가 필 때였다
울음이 쏟아질 때였고 맨살이 터질 때였다
그때가 사랑이었고 그때마다 이름에 색칠을 했다

-‘벌받는 별’ 중에서.

[뉴스페이퍼 = 김보관 기자] 정끝별 시인은 순한글 이름을 갖고 있다. 4남 2녀 중 막내로, 한 해의 마지막 날에 태어난 시인은 자신의 특별한 이름과 낮은 존재감 속에서 ‘우리말’과 ‘모어’에 대한 관심을 키워왔다. 그래서일까, 그의 시 안에서는 소리가 맞부딪히면서 나는 신선한 의미들이 가득하다.

지난 6월 출간한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는 이러한 시인의 특성과 모어에 관한 실험을 최대치로 끌어낸 시집이다. 정끝별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는 문장이나 어구, 단어나 글자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음소 차원에서의 라임의 가능성과 애너그램의 가능성을 모색했다.”며 “내가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시를 쓰고,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시인이 되었을 때 내 시의 핵심은 모어 가능성의 최대치라는 지점에서 찾아지게 될 것이다.”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정끝별 시인 [사진 = 김보관 기자]

시인의 소개처럼 시집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을 이야기하면서 ‘라임’을 빼놓을 수 없다. ‘라임’은 시행의 일정한 자리에 같은 운을 규칙적으로 배열하는 기법으로 압운이라고도 한다. 시인은 ‘보는 시에서 듣는 시로’라는 말과 함께 다양한 매체를 언급하며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시적 감각을 이야기했다. 

마트에서 나를 맞이하는 건 카트다

쌓은 욕망의 리스트는
카트에 손이 닿는 순간 해방구다
그때부터 나를 끌고 가는 건 카트의 너트다
네 개의 쌍방향 회전 바퀴다

카트는 거대한 내부를 품고 있다

-‘마트카트’ 중에서.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에 실린 시를 읽다 보면 최근의 힙합 열풍 속에서 랩의 ‘라임’이 떠오르기도 한다. 운율을 맞추는 동시에 시적 의미나 시상을 그려내는 데에 탁월한 구절들이 돋보인다.

정끝별 시인은 “우리 시가 ‘노래하는 시’에서 ‘읽는 시’로 바뀐 게 20세기, 불과 100년 전이다. 21세기, 이제 시는 보는 시와 듣는 시로 다시 귀환하고 있다.”며 시는 유통되는 매체의 변화와 맞물려 있음을 설명했다. 근래 유튜브 시대의 도래와 힙합과 랩의 유행을 시 세계와 연결한 것이다.

시인은 ‘랩퍼는 현대판 시인’이라고 명명할 만큼 랩과 시가 닮았음을 짚으며 “시는 변하는 것이다. 100년 전 시는 시조였고, 1930년대 시와 1980년대의 시 역시 다르다. 시는 시대에 따라 움직인다.”고 강조했다.

시작(詩作)의 비결로는 “시어를 선택하거나 시의 행과 연을 직조할 때 늘 낭독을 전제로 읽어보곤 한다. 읽어본다. 한 단어를 중심으로 유의어, 반대어, 유사어, 연관어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고 그중에서 의도에 맞게 선택하고 배열한다.”라고 답했다. 시인이 말하는 ‘잘 쓴 라임’은 새로운 의미들의 발견과 이어져 있으며, 독자의 귀를 즐겁게 할 뿐만 아니라 시인의 상상력에 박차를 가하게 한다.

시집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와 정끝별 시인 [사진 = 김보관 기자]

자소서와 조사서
사이를 이사하듯
오가나 오 나가
대박전문 앞 문전박대 

-‘깁스한 시급―애너그램을 위한 변주’ 중에서.

‘애너그램을 위한 변주’ 연작시를 포함한 여러 시에서 활용된 애너그램 기법 또한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다. 애너그램이란 철자의 위치를 바꾸어 새 어구를 만드는, 어구 전철(轉綴, 철자 바꾸기)을 일컫는다. 정끝별 시인에 의하면, 그간 한글은 애너그램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됐다. 자모를 일렬로 풀어쓰는 방식인 영어의 경우 ‘time’이 ‘emit’, ‘mite’ 등으로 재구성이 가능한 데 반해 자모를 교차적으로 모아쓰는 우리말의 경우 받침은 물론 이중자음과 복모음들이 있어서 애너그램이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어느 날 ‘가미’라는 분식점 상호를 보고 문득 그 음소를 뒤바꾸니 ‘기마’라는 글자가 만들어짐을 깨달았다. 우리말에서도 애너그램이 가능하다는 것, 애너그램이 가능한 언어들만을 가지고 한 편의 시를 쓴다는 것이 시인에게는 ‘최초의 항해를 떠나는 일종의 모험이자 즐거운 발견’이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시급’이라는 단어를 구성하는 ‘ㅅㅣㄱㅡㅂ’ 의 음소를 재배열하면 ‘깁스’라는 단어가 생겨나는 방식이다. 정끝별 시인은 “애너그램이 가능한 단어들만으로 한 편의 시가 직조되는 과정은 새롭고 또 즐겁다. 이런 애너그램 역시 유사한 소리로 간접적인 라임을 이루기도 한다. 새로운 표현과 생각, 스타일에 대한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웃어 보였다.

눈물도 고이면 썩기 마련, 깨진 과육은 바닥이 마를 때까지 흘러나오기 마련, 내가 머문 이 한철을 너는 더 오래 머물 것이다 머문 만큼 남을 것이다

-‘소금인간’ 중에서.

은유를 통한 ‘아포리즘적 발견’에 대한 부분도 인상 깊은 특징 중 하나였다. 아포리즘(aphorism)은 깊은 진리를 간결하게 표현한 말이나 글로, 격언, 금언, 잠언, 경구, 속담 등을 두루 지칭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처럼, 주로 한 문장이나 두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기억하기 쉽고, 짧은 내용에 재치나 통찰을 담고 있어 듣는 이의 머릿속에 오래 남는 특징이 있다. 

시인은 “인간 이성이 동의하는 20세기적 거대담론 혹은 중심을 상실한 21세기의 시에서 아포리즘은 시를 현실(내용, 의미)에 붙여놓는 압정과도 같다.”며 “한 시인의 세계관을 조명해주는 시적 장치로서의 아포리즘은, 우리 시대의 아포리아(aporia, 통로가 없는 것, 길이 막힌 것)에 시로서의 존재 가치를 지탱시켜주는 유포리아(euphoria, 다행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시에서의 아포리즘적 발화 또한 과거 금기시되었던 시작법이다. 이와 관련해 정끝별 시인은 “시의 역할이나 기능은 늘 변화한다. 20세기에 금기시되었던 게 21세기에서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으로 작용한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시집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목차 중 [사진 = 김보관 기자]

이처럼 정끝별 시인의 시는 변화하는 시대와 함께한다. 시대적 흐름과 시인 개인의 경험이 합쳐져 시집의 3부 ‘젠더의 새벽은 아직 춥다’가 따로 마련됐다. 

젠더의 측면에서 읽을 수 있는 시들은 3부를 비롯한 시집 전반에 고르게 퍼져 있다. ‘젠더의 온도’에 대한 성찰에 관해서 시인은 “두 딸이 성인이 되면서, 여성으로서 저에게 부가되었던 채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고 그 일환으로 여성적 정체성에 대해 뭔가를 정리하면서 선언하고 싶었던 거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가장 추운 추위와 가장 차가운 더위 사이에 위도가 있다 내 잠의 지적도다 사춘과 갱년 사이에 청춘이 있다 가팔랐던 꿈의 등고선들이 빽빽하다 뺨은 덥고 손은 차다 입꼬리는 나아지고 아래턱은 높아진다

시든 날은 날로 덥고 잠든 나는 날로 차고

더운 세계를 낳은 젠더의 새벽은 아직 춥다

-‘젠더의 온도’ 중에서.

딸, 애인, 아내, 엄마, 여성시인, 여성평론가, 여성연구자, 여성교수로 살면서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조건과 맞서 싸워야 하는 타자화된 주체로서의 정끝별 시인은 “남자보다 두 배 이상의 능력이 있어야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다는 피해의식 속에서 두 딸을 오히려 더 강하게 키우려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소회를 털어놓았다. 

이어 “만인의 평등, 만물의 상생, 만유의 자유, 이런 유토피아는 시가 꿈꾸는 아름다운 가치들이다. 불가능의 가능성을 꿈꾸는 것이야말로 시의 가치이기도 하다.”며 “그런 의미에서 성평등, 다양한 성의 상생, 성의 자유는 우리 사회가 꿈꾸어야 할 지향점이기에 이 사회의 절반인 여성들이 ‘여자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온갖 강요와 불의와 폭력들에 저항하고 반대하려 한다.”고 전했다. 그동안 시인 자신을 위해서 혹은 자신과 싸웠다면, 이제는 약자와 타자를 위한 보다 적극적인 반대와 연대들을 찾아볼 예정이라고 한다.

시집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를 읽는 정끝별 시인 [사진 = 김보관 기자]

창작자로서 기존의 틀을 깨거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행위는 항상 쉬운 일만은 아니다. 이런 유연성을 유지하게 된 동력을 묻자 시인은 “이미 익숙해진 시들은 재미가 없다.”며 ‘다채롭고 다른 것들에 대한 매혹’에 더불어 젊은 대학생들과 생활하는 직업적 조건을 언급했다. 20대 초반의 딸들과의 소통을 위해서 젊은 감각과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하게 되기도 했다.

끝으로 “미래를 살아갈 딸들과 이후의 세대들을 위해서 시의 현재가 더 생생해졌으면 한다.”는 정끝별 시인은 “시적인 사유와 시적인 언어 활동, 시적 상상력이 우리 삶 속의 토대가 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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