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61) / 자존심-곽해룡의 ‘고요한 밤’
고요한 밤
곽해룡
며칠 전 식당에서 돼지고기를 구워놓고
아버지는 소주를 나는 사이다를 잔에 부어
짠! 하고 부딪뜨리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1,000원이라고 쓰인 종이와
껌 한 통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작달막한 키
굽은 등
거무튀튀한 얼굴색
외국에서 돈 벌러 온 사람 같았다
한쪽 손을 옷소매에 감춘 아저씨에게
“돈 벌러 왔으면 일을 할 것이지 왜 구걸을 하고 다녀요?”
아버지가 말하자
아저씨는
감추었던 손을 보여주었다
손가락이 두 개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미안하다며
아저씨에게 만 원을 쥐어주고
어서 가시라 했다
서둘러 식당을 나서려는데
간 줄 알았던 아저씨가 다시 와서는
구천 원을 돌려주었다
그냥 가라는 데도
기어코 돌려주고 갔다
벚나무 가로수들이
꽃등을 켜
아저씨의 굽은 등을 비춰주었다
바람 불면 꽃잎
우르르 쏟아질 것 같은 고요한 밤이었다
—『맛의 거리』(문학동네, 2008)
<해설>
동시치고는 꽤 긴데 내용은 어른이나 아이나 다 이해할 것이다. 우리나라에 돈 벌러 온 외국인이 몇 십만은 되지 싶다. 그들 중에는 열심히 일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이도 있지만 본국에 있을 때보다 더욱더 불행한 처지에 놓이는 경우도 많다. 외국에 가서 돈을 번다는 것,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동시의 주제는 인간 존중일까 측은지심일까 자존심일까 염치일까. 우리 주변에 염치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 (나도 그런 축에 들어갈지 모른다.) 내가 예전에 모셨던 어떤 분은 술집이나 식당에 갔을 때 좀처럼 지갑을 안 여는데, 내 기억이 틀림없다면 10년 동안 한 번도 안 냈다. 우리는 그를 놀렸다. 집도 잘사는 게 아니더라고.
궁핍해도 염치를 아는 사람이 있고 부자인데도 염치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 동시 속의 화자 아이는 이 일을 통해 크게 깨달았을 것이다. 염치를 안다는 것은 얌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뜻임을.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