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59) / 삶의 현장 시화호-김왕노의 ‘공단의 봄’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59) / 삶의 현장 시화호-김왕노의 ‘공단의 봄’
  •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09.2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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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59) / 삶의 현장 시화호-김왕노의 ‘공단의 봄’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59) / 삶의 현장 시화호-김왕노의 ‘공단의 봄’

  공단의 봄

  김왕노


  양철 조각 같은 새떼가 하늘로 떠오르고 있었다
  봄이 오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지만 
  아직 공단에는 봄이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불법체류자가 모여들고 조선족이 모여들어
  철야로 몸이 너덜거리도록 기계를 돌려도
  완제품의 봄 하나 만들지 못했다고 말했다

  밀물이 오면 봄기운도 온다고
  항만의 모든 배들이 하역인부들이 물때를 기다렸지만
  밀물이 오면 오는 것은
  가슴 언저리에서 부서지는 거친 파도였다
  폐선의 몸체를 삐걱거리게 하는 바람이었다

  저무는 하늘에 가래 같은 별이 찾아오고 있었다
  어느 별에서나 이산화황 냄새 풍겨나고
  봄은 어느 쪽에서 오느냐고 물어도
  누구 하나 제대로 방향을 가리키지 못했다
  누구는 월급봉투가 두툼해지면 그때가 봄이라고 하고
  누구는 수당이 올라야 봄이라고 했지만 
  어디나 해고의 불안이 웅크려 있을 뿐 기다리는 날은 오지 않았다

  숭어 떼 찾아들면 봄도 온다고 했지만
  숭어 떼 돌아와도 돌아오지 않던 봄
  카드빚에 카드빚이 늘어가는 나날
  잡힌 숭어에서는 기름 냄새가 나고
  어제 누군가 또 프레스에 손가락이 잘려 봉합수술을 받았지만
  한 번 잘린 꿈의 신경은 결코 이어지지 않았다

  양철 조각 같은 새떼가 자욱이 시화호 하늘로 날아올라 봄을 찾고 있었다
  시위하고 있었다
   
-『리토피아』(2002. 겨울)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59) / 삶의 현장 시화호-김왕노의 ‘공단의 봄’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해설>

  근무지가 경기도 안성이다. 점심 먹으러 학교 바깥으로 나가면 외국인을 종종 볼 수 있다. 김왕노 시인은 안산의 시화호 근처 반월공단에서 가서 취재라도 한 듯 그곳의 분위기를 잘 묘사하고 있다. 불법체류자와 조선족이 그곳에는 안성보다 더 많을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 박노해와 백무산은 이런 시를 쓰지 않지만 몇몇 시인은 할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다. 
  시라는 것이 아픈 현실을 헤치고 나아가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면 나른한 봄날에 허공에다 내뱉는 하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 시는 당대적 아픔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불법체류자와 조선족이 모여든 반월공단은 사시사철 춥기만 하다. 이 카드빚을 저 카드로 돌려막아도 늘어나기만 하는 나날, 잡힌 숭어에서는 기름 냄새가 난다. 
  시인은 시화호 하늘로 날아올라 봄을 찾는 양철 조각 같은 새떼를 “시위하고 있었다”고 표현함으로써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현실과 대결하려는 몸짓을 보여준다. 시화호 부근에 있는 반월공단에 가보면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몸을 던져 꿈을 낚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기름밥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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