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 100주년 공동 심포지엄] 한국 정치사에 발을 맞춘 한국 문예지의 100년 역사 (3)
[문예지 100주년 공동 심포지엄] 한국 정치사에 발을 맞춘 한국 문예지의 100년 역사 (3)
  •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09.23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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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사에 발을 맞춘 한국 문예지의 100년 역사(3)
  
이승하(시인ㆍ중앙대 교수)

이승하 시인 [사진 = 김보관 기자]

*이 글을 쓰는 데 참고로 한 책은 아래와 같다. 애당초 발표했던 발제문에는 각주를 붙여 일일이 출처를 밝혔지만 각주를 달 수 없는 인터넷 환경이라 책명만 서두에 밝혀둔다.

  김근수, 『한국잡지사연구』, 한국학연구소, 1992. 
  정진석 외, 『한국 잡지 100년』, 사단법인 한국잡지협회, 1995. 
  최덕교 편저, 『한국잡지백년』 1, 2, 3, 현암사, 2005(재판).

  8. 계간 『창작과 비평』의 등장과 『문학과 지성』과의 대립
  
  1961년 5월 16일에 발발한 쿠데타는 4ㆍ19혁명의 감격을 일시에 무너지게 했고, 국민의 민주화를 위한 열망에도 찬물을 끼얹었다. 민주화를 위한 열망만 있었지 민주주의를 실천한 경험이 없었던 대다수 국민들에게 ‘혁명 공약’이니 ‘국가 재건’이니 ‘민정 복귀’니 하는 쿠데타 세력의 말은 달콤한 솜사탕의 역할을 하였다. 쿠데타의 주력은 국가재건비상조치법과 부정축재처리법을 공포하여 분위기를 잡은 뒤 개헌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78.78%의 압도적인 찬성표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박정희는 육군 소장에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변신한 뒤,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3공화국의 문을 열었고, 이로써 우리나라는 또 한 명 독재자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된다.
  혁명 직후에 분출한 민중의 다양한 요구가 불러온 사회의 혼란이 쿠데타 세력에게 거사의 기회를 제공한 탓에 제3공화국의 탄생은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와 국민이 곧바로 재건의 깃발 아래 손잡고 모여 일로매진하지는 않았다. 1963년의 4대의혹사건과 1964년의 삼분폭리사건 및 1966년의 한국비료헌납사건은 제3공화국이 부정축재자들을 제대로 처벌하고 부정부패의 사슬을 완전히 끊은 뒤, 오로지 ‘혁명’의 정신에 입각하여 출범한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아울러 1964년의 6ㆍ3사태와 언론 파동 및 인민혁명당사건은 스스로 이름 붙인 ‘5ㆍ16혁명’의 순수성에 금이 가게 했다. 
  이러한 60년대 전반기의 혼란스런 정치상황은 전통적 서정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던 많은 문학인들에게 자성을 촉구하였다. 문학인들은 4ㆍ19 직후에는 시민이 이룩한 혁명의 터전 위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의 문제로 고민하였고, 쿠데타 이후 사회가 차츰 경색 국면으로 접어들자 문학의 현실참여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온건한 서정의 테두리 안에 계속 머물고자 한 문학인의 수가 여전히 많았지만 4ㆍ19혁명이 불러일으킨 변혁의 기운은 한국문인협회가 큰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던 기존의 문단에 일대 충격을 줄 용틀임을 하고 있었다. 우리 문단 최초의 본격적인 계간지인 창작과 비평의 탄생은 이러한 상황과 무관할 수 없었다. 1966년 1월에 발간된 창간호(겨울호)에 실린 백낙청의 권두 논문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는 서문을 대신한 글이다. 

  오늘에 와서 낡은 순수주의를 고집한다는 것은 정녕 순수예술 이외의 어떤 동기를 감춘 고집이라는 심증을 굳혀줄 수밖에 없다. (…) 어떤 부정적 사회기능을 가진 문학이 특정한 역사적 상황과 인간의 산물인 만큼 문학으로부터 좀 더 적극적인 사회기능을 요구할 때 그러한 문학을 낳을 수 있는 사회 및 인간에 대한 꿈이 있어야 하며 그 꿈의 실현에 문학이 참여하기 위한 구체적 복안이 요구된다. (…) 애초부터 문학이 그들의 오락일 수도 없는 사람들의 괴로움과 억울함을 대변하는 것, 동시에 최고의 수준을 고집하는 독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 그리고 그것이 그의 용기와 양심을 마비시키지 않고 오히려 북돋아주는 건전한 오락이 되는 것―이러한 조건을 다 갖춤으로써만 한국문학은 오늘의 사회에서 살 수 있으며, 작품은 팽팽한 긴장과 생명력을 얻을 것이다.

  제일 앞 문장은 문협(한국문인협회) 정통파를 암시하는 ‘순수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표출한 것이다. 그리고 ①사회 및 인간에 대한 꿈을 실현하는 데 참여하기 위한 문학, ②하층민의 괴로움과 억울함을 대변할 수 있는 문학, ③재미를 갖춰 고급독자에게도 건전한 오락이 될 수 있는 문학을 지향하겠다는 결심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창작과 비평』의 기본적인 편집 방향이라 할 수 있다. 4ㆍ19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식의 말은 없지만 “1940, 50년대 한국 문단의 사회적 기능이란 미미한 것”이었으므로, “우리 문학이 그 사회 기능을 되찾고 문학인이 사회의 엘리트로서 복귀하려는 것은 이광수에서 멎었던 작업을 새로 시작하는 일”이라면서 60년대 문학의 계몽적 소임을 논하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 간에 국교가 정상화되는 한일협정이 1965년 6월 22일에 정식으로 조인되는데, “한일 국교에 임하여 불만과 뉘우침과 두려움이 많은 대로 우리 문학은 또 하나의 기회를 내다보게 되었다”고 하여 이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자는 다짐도 해보고 있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서울대학에서 영문학 교수로 있던 백낙청은 계간지를 편집하면서 기존의 문예지와는 변별되는 몇 가지를 고집하여 눈길을 끌었다. 창간호부터 가로쓰기에 한자의 괄호 처리, 사진과 삽화의 배제(대담을 한 이들의 사진을 잡지에 넣는 것은 70년대도 중반에 가서부터였다), 사회ㆍ역사 비평문의 게재, 외국 문학이론의 번역 소개, 문학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문과학서와 사회과학서에 대한 서평 게재는 이전의 문예지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요소였다. 쪽수가 한 해 동안 계속 이어지는 식의 편집과, 그 호의 대표 작품과 저자의 이름을 표지에 등장시키는 것도 국내에서는 새로운 시도였다. 신인상 제도를 따로 마련하지 않고 작품을 실어줌으로써 바로 등단시키는 것도 획기적인 일이었으며, 장편의 집중분재 후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것도 기존의 월간지에서는 하지 못했던 일이다.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의 이러한 새로움은 대학생을 포함한 수많은 지식인의 호응을 얻었고, 그 사회적 파급 효과는 1970년 5월호를 끝으로 강제 폐간된 월간 종합 교양지 『사상계』에 못지않은 것이었다. 『창작과 비평』은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나라 계간지의 선구자였다. 이는 단지 시기적으로 제일 먼저 나왔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점들이 훗날 출간되는 계간지들에게 전범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발행소는 7호까지가 문우출판사였고, 8〜14호까지가 일조각, 15호부터 비로소 창작과비평사가 되었다. 14호까지의 편집인은 백낙청이었지만 15호(1969년 가을/겨울 합병호)부터는 시인 신동문이 발행인과 편집인을 겸하였다. 1972년 가을호부터는 염무웅이 주간이 되며, 그해 겨울호에 다시 백낙청이 편집을 맡았다. 『창작과 비평』의 60년대 필진은 『문학과 지성』이 탄생한 1970년 이후의 필진과는 좀 다르다. 60년대의 주요 필자를 살펴보면 논문과 평론은 백낙청 외에 김우창ㆍ김현ㆍ염무웅ㆍ유종호ㆍ정명환이 2편 이상씩 발표하였다. 중요한 소설 필자는 김승옥ㆍ김정한ㆍ박태순ㆍ방영웅ㆍ서정인ㆍ이문구ㆍ이청준ㆍ이호철ㆍ최인훈이며, 시 필자는 김광섭ㆍ김수영ㆍ김현승ㆍ신동엽ㆍ이성부ㆍ정현종ㆍ조태일ㆍ최하림ㆍ황명걸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훗날 문학적 지향점을 달리하여 『문학과 지성』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지만 이 시기에는 『창작과 비평』이라는 유일무이한 진보적 성향의 문예지를 무대로 함께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3회로 분재된 방영웅의 「분례기」는 『창작과 비평』의 지가를 올린(연재가 끝나자 책값이 100원에서 130원으로 오르긴 했다) 장안의 화제작이었고, 송영이 단편 「투계」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일, 서정인이 5, 9, 11, 13호에 계속해서 작품을 발표한 일, 이청준이 초기의 대표작 「병신과 머저리」와 「과녁」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일 등은 특기할 사항이었다. 
  1968년 겨울호는 당시의 시대적 이슈를 포괄하려는 편집자의 노력 덕분에 ‘한글 전용의 이모저모’를 특집 제목으로 삼았고, 70년대에도 ‘분단시대의 민족문화’, ‘대중문화의 현황과 새 방향’, ‘제3세계의 문학과 현실’ 등 좋은 특집을 많이 마련하였다.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의 이러한 진일보는 창작과 비평이 우리나라 계간지의 선구자임을 자임하는 데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하였다. 
  1969년은 박정희 대통령이 임기를 연장하려고 마음먹고서 몇 가지 전초작업을 한 해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연임에 이어 세 번째로 대통령을 할 수 있다는 3선개헌안이 국회에서 변칙으로 통과되었고, 국민 65%의 찬성투표로 가결되었다. 이 해의 주문진 무장공비 출현과 미정찰기의 피격 추락, KAL기 납북사건은 시대 상황에 대한 국민의 판단력을 흐리게 해준 대신 집권세력에게는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1970년 청계천 평화시장의 젊은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죽음은 노동계의 현실에 대해 무관심했던 지식인들을 각성시켰고, 노동자와 지식인의 연대를 위한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1970년은 또 우리 문단에 큰 사건이 발생하고, 큰 행사가 벌어지고, 판도가 바뀌기 시작한 해였다. 큰 사건은 김지하의 시 「오적」 필화사건과 그로 인한 『사상계』의 등록 취소이며, 큰 행사는 서울에서 국제펜대회가 열린 것이며(국제펜대회에 운집한 세계의 문인들을 의식한 정권이 김지하를 구속 한 달 만에 보석으로 풀어준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문단의 판도 변화는 1970년에 창간된 또 하나의 계간지 『문학과 지성』에 의해 이루어졌다. 
  일조각이 1967년 겨울호부터 1969년 여름호까지 『창작과 비평』의 발행소였으며, 배턴 터치를 하듯 창간호(1970년 가을호)부터 1977년 봄호까지 『문학과 지성』의 발행소였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양쪽 계간지의 편집자가 한만년 일조각 사장과 다 친분 관계가 있어서이겠지만 초기의 『문학과 지성』은 『창작과 비평』의 이념적 지향점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적어도 70년대 전반기 몇 해 동안은 『창작과 비평』과 『문학과 지성』이 문학관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 이유는 혈기왕성한 젊은 나이에 4ㆍ19혁명의 감격을 몸으로 체험했거나 눈으로 확인했다는, 상황에 대한 공감대가 뚜렷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홍정선의 글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4ㆍ19정신이 혁명 기념시 류의 흥분 상태에서 벗어나 역사ㆍ철학ㆍ문학 등의 각 분야에서 이론적으로 천착됨으로써 그것들의 기저층으로부터 새롭게 표면화되기 시작하는 것은 대체로 60년대 후반부터의 일이다. 70년대 문학을 형성하고 주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창비』와 『문지』의 정신은 4ㆍ19정신의 이러한 심화 과정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 한편 4ㆍ19정신을 계승하고 ‘4ㆍ19세대를 옹호’하겠다는 기치를 내건 점에서는 양측 모두 마찬가지였으나 그 방법적 차이는 60년대 말에 개별적 구성원 속에서 조금씩 예비되고 있었다.
 
  60년대에 나온 『창작과 비평』지 필자의 상당수가 훗날 『문학과 지성』으로 옮겨가지만, 70년대 전반기 몇 해에 걸쳐 이 구별은 무의미한 것이다. 창간호를 준비하면서 김병익ㆍ김치수ㆍ김현 세 사람은 『문학과 지성』의 특색을 재수록 제도를 통해 확보하려고 하였다. 창간호에 정현종ㆍ윤상규와 더불어 이성부ㆍ조태일ㆍ김준태의 시를 나란히 재수록한 것이나, 『창작과 비평』에 실렸던 최인훈의 「소설가 구보씨의 1일(2)」를 재수록한 것은 양자 간의 길트기가 공공연해진 90년대에 행해졌더라도 많은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릴 일이었지만 70년대 초에는 별로 어색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념의 기치를 분명히 내건 『문학과 지성』의 창간사를 봐도 두 계간지의 정신적 지표가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한국 현실의 투철한 인식이 없는 공허한 논리로 점철된 어떠한 움직임에도 동요하지 않을 것이며, 한국 현실의 모순을 은폐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에도 휩쓸려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진정한 문화란 이러한 정직한 태도의 소산이라고 우리는 확신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정신을 안일하게 하는 모든 힘에 대하여 성실하게 저항해나갈 것을 밝힌다.

  70년대의 문단에서 두 계간지는 외국문학 이론의 소개와 적용, 작품의 선정과 평가에 있어 다른 문예지를 압도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창작과 비평』과 『문학과 지성』이 1980년에 ‘신군부’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등장한 정치권력에 의해 강제로 폐간되기 전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평론가들이 편집하는 일종의 동인지 체제였기 때문이다. 창간동인 3인의 친구인 김주연은 6호부터 참가하였다. 이들 4명은 『문학과 지성』을 이끈 편집동인으로서 세칭 ‘문지 4K’였고, 오생근을 비롯하여 김용직ㆍ김우창ㆍ김윤식ㆍ김종철ㆍ박이문ㆍ송욱ㆍ이상섭ㆍ천이두 등이 자주 글을 발표하였다. 편집동인 네 사람은 1972년에 낸 『현대한국문학의 이론』(민음사)이란 책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1차적으로 정리할 기회를 갖는다.
  이 책의 서문에서 한 “4ㆍ19의 거센 흥분이 지나가고 난 뒤, 우리는 이렇게 하여 歷史의 의미와 만났다”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듯이, ‘역사의식’에 기반한 문학관은 그 두 계간지의 편집 방향에 큰 편차를 둘 수 없게 하였다. 강만길ㆍ김철준ㆍ송건호ㆍ이기백ㆍ이만열ㆍ천관우ㆍ홍이섭 등은 양 계간지에 중요한 논문을 발표한 사학자였다. 
  『창작과 비평』은 백낙청을 정점으로 염무웅(8호부터 작품 발표)이 비교적 자주 글을 발표하였고, 구중서(17호부터)와 이선영(28호부터)이 가끔씩 응원을 하는 형국이었다. 비평 분야만 놓고 본다면 70년대의 『창작과 비평』은 백낙청이라는 일당백의 군주가 있기는 했지만 『문학과 지성』에 비해 수적 열세를 면치 못했다고 본다. 차세대를 이끌 최원식이라는 문(학문적 깊이)과 무(이념적 무장)를 겸비한 뛰어난 비평가는 1977년 겨울호를 통해서야 등장한다. (『창작과 비평』이 1994년부터 신인 평론가를 뽑아 상을 주고 있는 것은 편집동인의 세대교체를 이룩한 『문학과 사회』를 의식해서가 아닐까.)
  아무튼『창작과 비평』과 『문학과 지성』은 ‘4ㆍ19혁명’이라는 아버지 밑에서 별 충돌 없이 자라던 네 살 터울의 이복형제 같은 존재였다. 연륜이 쌓이면서 둘은 문단에서 더욱 영토를 넓혀갔는데, 때마침 유신헌법이 공포되고 시국이 경색 일변도로 치닫자 문학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달리하게 된다. 1972년 10월 대통령특별선언(10월유신)에 따라 국민투표로 확정된 유신헌법은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과 국회해산권 등 초헌법적 권한을 부여하고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함은 물론 중임제한조항을 철폐한 전대미문의 악법이었다. ‘역사의식’에 기저를 둔 실천적 문학관을 갖고 있던 두 진영의 이론가들은 시대가 부과하는 고통스런 질문들 앞에서 방법론을 서서히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홍정선은 두 계간지가 1966년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커다란 마찰 없이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4ㆍ19라는 공동의 정신적 체험과 따뜻한 인간관계 때문이었지만 이후 염무웅이 말한 ‘민중적 실천’과 김병익이 말한 ‘양식화의 아름다움’에서 그 차이점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하였다.
  『창작과 비평』은 백낙청이 중심이 되어 시민문학론에서 출발, 민족문학론ㆍ민중문학론ㆍ농민문학론ㆍ제3세계문학론 등으로 논리를 확산시켜 나갔다. 한편 『문학과 지성』은 정신분석비평ㆍ구조주의ㆍ기호학ㆍ문학상상력ㆍ문학사회학 등 서구의 문학이론을 성실히 소개하면서 이들의 한국문학에의 적용을 진지하게 모색하였다. 전자가 아놀드 하우저와 C.W. 밀즈를 소개한 반면 후자는 바슐라르와 골드만을 소개하였다. 전자가 서구 사실주의 작가들을 신뢰한 반면 후자는 누보로망 계열의 작가들을 선호하였다. 요컨대 『창작과 비평』은 이 사회가 안고 있는 제반 현실 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근대화 과정에서 희생양이 된 노동자와 농민에 대해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한편, 정치현실의 부조리한 상황과 물질적 소외에 대한 항변을 자주 작품의 소재와 주제로 삼았다. 반면 문학과 지성은 문학에 있어서 순수성과 정신의 자유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문학의 형식미학적 측면을 중요하게 다뤘으며, 현대 문명이 야기한 잡다한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인간 내면의 부조리함, 지식인의 정신적 소외 현상 등을 즐겨 다루었다. 『문학과 지성』에 연재된 글 가운데 김윤식ㆍ김현이 쓴 『한국문학사』는 우리 문학사를 수놓은 작가의 사상적 위치를 밝혀내려는 책으로, 1973년 8월 민음사에서 단행본으로 내주어 널리 읽혔다. 
  『창작과 비평』이 문학 창작의 전통적인 기법을 고수하여 대중의 사랑을 받은 반면, 『문학과 지성』은 실험적이고도 고도의 지적 훈련을 요하는 작품을 선호하여 지식인 계층에 어필하였다. 두 계간지의 상호 경쟁은 다른 문예지들에게도 많은 자극을 주었고, 결과적으로 우리 문학의 풍요에 크게 기여하였다. 문학이 현실ㆍ정치ㆍ역사와 동떨어진 곳에서 초연할 수 없음을 ‘순수주의자’들에게 일깨워준 점도 간과할 수 없는 공적이다. 하지만 그 무리에 들지 못한 자들은 두 계간지의 편집 자세를 두고 섹트주의니 배타적이니 선민의식이니 하며 비난을 하기도 했다. 

 

  9. 언론통폐합조치 이후 무크지의 성행

  제5공화국은 밀실에서 신군부 세력의 모의로 탄생하였기에 정당성이 전무하였다. 이 정권의 탄생과 광주민주화운동의 무력진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언론인과 문학인이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제5공화국 정권은 언론사 대학살을 감행했으니 바로 ‘언론통폐합조치’였다.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 아래 1980년 11월 14일 한국방송협회ㆍ신문협회 등은 총회를 열고 방송ㆍ신문 통합 등에 관한 결의문을 발의했다. 이에 따라 중앙지 신문은 7개에서 6개로, 지방지 신문도 14개에서 10개로 줄었다. 합동통신과 동양통신이 해체ㆍ통합되면서 연합통신이 설립되어 대한민국의 유일한 통신사가 되었다. 방송에선 한국방송공사(KBS)가 민영 방송인 동양방송ㆍ동아방송ㆍ전일방송ㆍ서해방송ㆍ한국FM을 인수하고, 민영방송 문화방송의 주식 65%를 강제 인수함으로써 대한민국 최대의 언론기관이 되었다. 문화방송은 제휴민영방송사인 지방의 다수 문화방송의 지분의 반 이상(35%)을 문화방송으로 강제로 양도시켰고 한국방송공사에게 자사의 주식 65%를 넘겨 법적 공영방송이 되었다. 민주화운동에 기여해 왔다는 평가를 받는 기독교방송은 보도기능을 폐지당하고 종교물만 방송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172개 정기간행물의 등록을 취소함으로써 『씨알의 소리』『뿌리 깊은 나무』『창작과 비평』『문학과 지성』 등 유력지들이 폐간되었다. 
  ‘무크’는 잡지(magazine)와 단행본(book)의 합성어다. 1970년대 문학을 이끌던 잡지들이 강제로 폐간되자 한국문학 전반에 걸쳐 정권의 검열이나 통제 없이 자유가 보장되는 작품의 발표 매체를 찾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시도된 것이 무크지였다. 정상적인 출판이 불가능한 시점에서 무크지의 편법적인 출판 방법과 더불어 이 매체가 갖고 있는 강한 현장성과 기동성, 문화 게릴라적 성격이 무크지 전성시대를 열었다. 1980년대는 무크지 전성시대라 할 정도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무크지가 만들어졌으며, 그 결과 무크지의 문학은 1980년대 초ㆍ중반 한국문학의 중심을 이루었다.
  책과 잡지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 무크지는 본래 1970년대부터 미국 등에서 사회질서로부터 벗어난 이념과 형식을 자유롭게 발표하고자 하는 대안매체로 각광을 받던 출판 형태였다. 한국에서 무크지 시대를 연 『실천문학』은 ‘민중의 최전선에서 새 시대의 문학운동을 실천하는 부정기간행물(MOOK) 창간호’라는 표제를 달고, 1979년 하반기에 기획되어 1980년 3월에 발간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우리 세대(시대)의 문학』『언어의 세계』『지평』『삶의 문학』『문학의 시대』『여성』『전망』『민족현실과 지역운동』『정통문학』『우리문학』『문학예술운동』『민족과 지역』『노동문학』『현대시사상』 등 무크지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편 『창작과 비평』은 1988년 봄호를 복간호로 내기까지 신작평론집 『한국문학의 현단계』 4권, 3권의 신작소설집, 4권의 신작시집을 내면서 권토중래를 모색하였다. 한편 문학과 지성은 이인성ㆍ정과리ㆍ권오룡ㆍ성민엽 등에게 편집권을 넘겨 『우리 세대의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6권의 부정기간행물을 냈고(5집부터는 『우리 시대의 문학』으로 개명), 복간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2세대 편집진에 의해 『문학과 사회』라는 또 다른 이름의 계간지가 탄생되게끔 도와주었다. 
  이렇게 1980년대 초ㆍ중반 한국문학의 중심을 형성하던 무크지 문학은 1987년 이후 정기간행물에 대한 검열과 통제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창작과 비평』『문학과 사회』 등 정기간행물이 재간행되면서 서서히 약화되었다. 

 

  10. 『세계의 문학』 『실천문학』 『문예중앙』 『작가세계』 의 가세 

  70년대 내내 『창작과 비평』과 『문학과 지성』은 문단에서 강력한 자장(磁場)을 발휘하였다. 편집진의 편집권은 문학권력이요, 어느 집단이 권력을 오래 누리다 보면 부작용도 생겨나는 법이다. 두 계간지의 끝 모를 세력 확장에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창간 이래 소수의 평론가가 이끄는 일종의 동인지 체제를 좀체 벗어나지 않아서인지 두 계간지의 ‘오만과 편견’과 파당성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리하여 기회를 포착하여 도전장을 낸 두 계간지가 있었으니, 1976년 가을호를 창간호로 삼은 『세계의 문학』과 1978년 봄호를 창간호로 삼은 『문예중앙』이다. 
  전자는 이미 ‘오늘의 시인총서’와 ‘세계시인선’, ‘오늘의 산문선집’으로 문예물의 기획과 출판에 노하우를 갖고 있던 민음사에서 시인ㆍ소설가의 확보를 위해 출간한 계간지였다. 후자는 중앙일보라는 언론사에서 역시 작가 관리의 차원에서 적자를 각오하고 계간지 출간에 뛰어들어 간행되었다. 
  『세계의 문학』은 김우창과 유종호의 책임편집체제로 출발했는데, 국내외의 좋은 문학작품과 인문과학 분야의 논문 및 서평을 광범위하게 싣는 것은 기존의 계간지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창간하자마자 시작한 ‘오늘의 작가상’ 공모로 한수산ㆍ박영한ㆍ이문열 등을 일거에 일급작가(혹은 인기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해외 번역소설 수록과 오늘의 세계문학 소개는 다른 계간지와 변별되는 새로운 모색이었다. 최종률ㆍ홍사중ㆍ구중서가 차례로 편집인이 된 『문예중앙』은 신문사에서 발행한 문예지여서 그런지 편집상의 모험을 시도하거나 거창한 이슈를 내걸지 않아 기존의 계간지나 월간지와 특별히 다른 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80년대에 들어서도 계속 고전을 했지만 훌륭한 작품을 싣고 좋은 신인을 찾아보자는 문예지 본연의 임무에는 충실하였다. 작가 탐방과 그럴듯한 풍경을 배경으로 한 명시 소개(포토 포에지), 문인의 문학 앨범, 문단 행사와 지방문단 소개를 권두 화보를 통해 하는 편집체제를 고집하여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80년대에 들어 중편소설을 공모하여 양순석ㆍ권광욱ㆍ이숙자ㆍ정길연ㆍ신경숙 등을 문단에 내보냈는데, 심사위원 각자가 따로 심사평을 쓰는 전통을 마련하였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기관지로 발간된 『실천문학』을 빠뜨릴 수 없다. 비상계엄하였던 1980년 3월,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펴낸 부정기 간행물로 출발했는데 초대 편집위원은 고은ㆍ박태순ㆍ이문구ㆍ송기원ㆍ이시영 등이었다. 1984년 이문구가 사장, 송기원이 편집주간으로 취임하였다. 1985년 계간지로 전환하였으나,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강제 폐간되었다가 1988년 봄 속간되었다. 1995년 상시적인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주식회사로 전환하였다. 지금까지 통권 132호를 발간하였다. 창간부터 문학의 현실비판, 현실참여, 민족ㆍ민중문학을 지향하였다. 특집ㆍ기획ㆍ대담 등을 통해 문학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쟁점을 제시했는데 1980년대에는 분단과 휴전이라는 역사적 현실과 리얼리즘 논쟁을, 1990년대에는 근대성ㆍ탈근대성을 통해 본 식민지 근대성, 지방자치시대의 지역성,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 이후 민중성, 거대담론의 위기를 진단하고 새로운 방향을 논의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조성된 동북아 시대의 평화를 위한 움직임,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의 위기,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한 세계적 연대의 분위기 조성 등의 쟁점을 제시하였다. 또한 친일문인ㆍ문학작품선집, 북한문학작품선집, 재일동포작품선집 등을 기획해 한국문학의 자료 발굴과 문학사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동하ㆍ최승호를 책임편집자로 삼아 1989년 여름호를 창간호로 낸 『작가세계』는 출판사 세계사가 낸 계간지로 100호 넘게 간행되었다. 어느 한 소설가나 시인, 평론가를 집중 조명하는 특집을 전면에 내세운 『작가세계』는 신인 발굴에도 신경을 썼다. ‘세계사시인선’과 함께 모던한 작품 경향을 이끌어 갔는데 2000년에 들어 판매부수가 떨어지고 장편소설을 공모한 ‘작가세계 작사상’이 주목을 못 받자 2017년에 112호를 마지막으로 발간이 중단되고 만다. 『세계의 문학』과 『문예중앙』도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슷한 시기에 휴간에 들어가는데 재출간은 어려울 듯하다. 이수화학에서 내던 종합문예지 『21세기문학』이 81호로 휴간에 들어갔다. 

 

  11. 중앙문예지의 수난과 지방문예지의 약진

  오늘날 많은 문예지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금에 목을 매고 있고, 받다가 탈락하자 분노에 찬 어느 편집주간은 문단에 여론을 환기시키고자 장문의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이른바 ‘등단 장사’를 하는 문예지도 많고 원고료를 줄 수 없다면서 정기구독으로 대신하는 문예지들도 꽤 되는데, 속사정이야 오죽하겠는가. 
  21세기에 들어와 폐간된 문예지로 『세계의 문학』『문예중앙』『작가세계』『21세기문학』 외에도 많다. 『시안』『시인세계』『시평』이 폐간을 했다. 모두 시 전문 계간지다. 더 일찍 1990년대부터 『소설문학』『현대시사상』『현대시세계』『외국문학』『문학과 경계』『한길문학』『상상』『문학정신』『정신과 표현』『문학수첩』『서시』『문학인』『문학판』『파라21』 같은 문예지가 사라졌다. 문학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옅어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바로 문예지의 폐간이다. 활자문화의 위축과 영상문화의 약진은 이제 보편적인 사회현상이 되었다. 세기가 바뀌면서 컴퓨터는 개인 소유물이 되었고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다들 컴퓨터를 손에 들고 다니게 되었다. 인터넷소설과 e-book 시장의 성장, 웹툰과 웹소설 독자의 증가, 작은 화면으로 볼 수 있는 영화와 드라마, 인터넷게임 시장의 성장 등에 힘입어 사람들은 화면을 보는 시간이 늘어났고 그에 반비례해 책을 읽는 시간은 줄어들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문학 자체가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던 것은 1980년대까지였다. 
  이러한 온갖 악조건 아래서 지방에서 문예지를 내고 계시는 분들께는 정말 존경과 감사의 말을 드리고 싶다. 문예지는 (확언할 수는 없지만) 적자를 내게 마련이다. 제작비와 원고료 지급에 매호 수백만 원은 들어갈 테니 한 호 낼 때마다 적자가 누적되고 결국 그 적자는 문예지 편집자의 목을 조일 것이다. 군소 서점에서 취급하지 않는 두 가지 책이 바로 문예지와 시집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중앙과 지방의 간극이 너무나 크다. 서울의 유수 문예지에서는 지방신문사가 공모한 신춘문예 당선자의 신작은 실어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등단한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방에서 나오는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사람 또한 중앙문단에서는 받아주기 않기 때문에 다시금 등단하기 위해 고투해야 한다. 
  이런 환경 아래서도 문예지를, 그것도 지방에서 내고 계신 분들에게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든 어디든 간에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텐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유수 기업체로부터 1년 홍보비의 1천 분의 1만 지원받아도 지방 문예지들은 숨통이 트일 것이다. 
  매호 기획도 알차고 좋은 작품을 싣는 지방의 문예지는 너무 많아 거론하기도 어렵다. 그중 인천작가회의 출판부의 『작가들』은 올해 여름호로 69호를 냈다. 인천의 『학산문학』이 104호, 『리토피아』가 74호, 전주의 『문예연구』가 101호를 냈다. 대전의 『애지』가 78호를, 『시와 정신』이 68호를 냈다. 광주의 『시와 사람』이 92호를, 『문학들』이 56호를 냈다. 청주의 『딩아돌하』도 50호를 냈다. 대구의 『시와 반시』가 108호를 냈다. 부산의 『오늘의 문예비평』이 113호를, 『시와 사상』이 101호를, 『신생』이 79호를 냈다. 제주의 『다층』이 82호를 냈다. 지역의 문화예술위원회에서 별도의 기금을 마련해서라도 그 지역의 대표적인 문예지를 지정,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한국문화의 중앙(서울) 쏠림은 마땅히 지양되어야 한다. 
  지방자치제의 도입 이후 전국 방방곡곡에 축제가 많이 생겨났으나 하나같이 먹고 마시고 노는 축제다. 테마가 있는 문화축제는 기대조차 할 수 없다. 지자체의 한 해 공적을 전시하는 유흥 위주의 축제는 전국 어디나 비슷한 잔치판을 벌인다. 유명 문인을 배출한 지역에는 문학관이 드문드문 생겨나더니 이제는 우후죽순격이다. 눈에 보이는 행정에만 생색내듯 수십억 원을 투자하는 현실 때문에, 이런 견실한 문예지들이 생존을 위해 고투하는 현실은 안쓰럽기 그지없다. 그 지방을 대표하는 이런 문예지들이 튼튼하게 존립할 수 있도록 소액이나마 지원을 아끼지 않기를 바란다. 지역의 이런 유수 문예지가 폐간되면 그 지면으로 등단한 우수한 문인들 또한 순식간에 미아가 된다. 그 지방의 자랑인 문인을 어느 순간 잃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문예지도 계속 나와야 그 값어치가 지속된다. 문예지가 폐간이 되면 그때까지 애써 낸 것들은 후속 문예지의 부재로 인해 그 값어치가 빠른 속도로 하락하고 만다. 애써 만든 책이 휴지가 되고 마는 것이다. 
  지역에서 나오고 있는 이들 문예지의 생명이 다들 100호를 넘어 오래오래 그 지역의 문학을 살찌우기 바란다. 그 문예지만의 특성, 그 지역만의 특성을 부각시키는 것도 좋을 것이다. 문예지마다 스미어 있는 그 지역 주민들의 삶과 꿈을 보듬어줄 줄 알아야 중앙문단도 함께 튼튼해질 수 있을 것이다. 아랫배로만 집중되는 비만은 좋은 것이 아니다. 중앙과 지역의 균형 있는 발전은 정치권에서만 할 일이 아니라 문학인들이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다. 

  12. 마무리 

  문예지 100년의 역사를 조감해보면 역사의 변동에 따라 문예지도 함께 부침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이 문화정책을 표방한 1920년부터 동인지와 문예지가 나오기 시작했다.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닌 『문장』과 세계문학으로의 발돋움을 꾀한 『인문평론』이 강제로 폐간당한 이후에 이를 대신한 『국민문학』과 『삼천리』가 1940년대를 주름잡았다고 할 수 있다. 종이 사정이 안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 대립이 첨예했던 해방공간에서, 한국전쟁 도중에, 그리고 전후의 폐허 속에서도 문예지와 잡지가 계속 나왔다. 
  흔히 ‘문협정통파’로 일컬어지던 한국문인협회의 주요 인물들이 편집에 직접적으로 간여했던 월간 『현대문학』(1955년 창간)에 도전장을 낸 것은 계간 『창작과 비평』(1966년 창간)이었다. 한국문인협회의 기관지인 『월간문학』과 김동리가 편집인과 발행인을 겸한 『한국문학』(1973), 이어령 씨가 의욕적으로 펴낸 『문학사상』(1972)이 순수문학을 지향했다면 계간 『창작과 비평』(1966)은 실천과 참여로서의 문학을 주중하면서 도전장을 내밀었다. 『창작과 비평』의 발전은 『문학과 지성』(1970)과의 경쟁에 힘입은 바 크다. 1970년대에는 『세계의 문학』과 『문예중앙』이, 1980년대에는 『실천문학』과 『작가세계』 같은 계간지가 나타나 한국문인협회 중심의 월간지들과 경쟁하고 대립하면서 발전하였다.  
  박정희의 제3공화국과 맞서 싸운 종합지 『사상계』가 김지하의 「오적」을 게재했다 필화를 입어 강제폐간이 되었고 그 전에 창간된 『창작과 비평』이 진보적 성향의 문인들을 위한 아지트의 역할을 해주었다. 1980년 11월 14일에 단행된 언론통폐합조치는 『창작과 비평』『문학과 지성』『뿌리 깊은 나무』 등 172개의 정기간행물을 폐간하는 분서갱유를 단행케 하지만 1980년대는 무크지의 시대가 전개됨으로써 문예지 공백상태를 방지하게 된다. 
  이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공산권이 붕괴된 1990년대부터 시작된, 문학의 사회적 영향력 약화가 초래한 독서인구의 축소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의 독자는 책을 읽지 않고 컴퓨터 화면을 보거나 스마트폰 화면을 보고 있다. 글자를 보더라도 종이에 인쇄된 글자를 보지 않고 화면의 불빛이 비춰주는 글자를 보고 있다. 1920년부터 2010년대까지 100년 동안 우리는 무자비한 정치적인 탄압 속에서 문학을 응전의 논리로 채택해 글을 쓰고 그 글을 읽었는데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다. 바뀐 세상에 대한 진단은 다른 자리에서 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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