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66) / 요즈음 기차 - 유희선의 ‘잠자는 캡슐’
잠자는 캡슐
유희선
고속열차는 달리는 거대한 캡슐
까만 속눈썹을 가지런히 덮고 잠을 싣고 간다.
칸칸 캡슐마다 스르르 닫힌 눈동자
최면에 걸린 듯
공상영화의 한 장면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게 하는 이 열차의 위력은
다름 아닌 적당한 온도와 습도, 그리고 속도
속도가 안정적으로 올라갈수록
하얗게
하얗게 달리는 잠
코 고는 커피포트처럼
끓고 있는 꿈들, 총천연색도 없고
삶은 달걀도 사이다도 없는
이상한 열차
밤이 없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
늘 잠이 부족한 나라
차창에 닿을 듯 빽빽한 탱자나무 터널 속으로
상향인지 하향인지 피로와 피로 사이를 오르내리는
혼몽한 무리들
나무늘보처럼 측 늘어진 무거운 잠을
드르렁!
들썩 들었다 놓으며
열차는 달린다.
—『하얀 바다』(한국문연, 2015)

<해설>
좀 이른 시간에 고속열차를 타본 사람은 시인이 그린 풍경에 십분 공감할 것이다. 다들 “밤이 없는 나라”에 왔는지 자고 있다. 출근을 하고 있거나 공무를 수행하느라 집에서 일찍 나와서 기차를 탄 사람들이어서 그런 모양이다. 나무늘보처럼 축 늘어져 무거운 잠을 자고 있는 샐러리맨들, 시인이 보건대 이들이 참 딱하다. 샐러리맨을 위한 ‘잠자는 캡슐’이 일본에서는 오래 전에 나왔고 부산에도 있다고 하는데 아직 보지는 못했다. 시인은 이른 시간의 고속열차야말로 거대한 캡슐이 아니겠냐고 말한다.
지방의 문학 행사에 참가하러 이 열차를 이른 시간에 몇 번 타보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승객들이 몽땅 눈을 붙이고 있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경험을 했음에도 시로 쓸 생각을 못했는데 유희선 시인에게 그만 선수를 빼앗겠다. 이 시의 매력은 예전의 완행열차 풍경 묘사에서 더욱더 발휘된다. “총천연색도 없고/ 삶은 달걀도 사이다도 없는/ 이상한 열차”라는 표현이 너무 재미있다. 세 번의 직유법도 상큼하다. 고속열차를 탈 때마다 “하얗게 달리는 잠/ 코 고는 커피포트처럼/ 끓고 있는 꿈들”이라는 절묘한 표현을 떠올릴 것이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