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67) / 주먹질을 멈추다 - 노영임의 ‘복서의 꿈’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67) / 주먹질을 멈추다 - 노영임의 ‘복서의 꿈’
  •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09.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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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67) / 주먹질을 멈추다 - 노영임의 ‘복서의 꿈’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67) / 주먹질을 멈추다 - 노영임의 ‘복서의 꿈’

  복서의 꿈
  
  노영임


  가볍게 톡톡 튀듯 재게 발 놀리지만 
  굳게 다문 입술과 날카롭게 빛나는 눈매
  상대의 허를 찾아서 잽, 잽을 날려 본다

  일격을 가할 얼굴마다 고유번호 매기는 건
  약해질 자신을 위한 모종의 장치랄까 
  시작종 소리와 함께 링 위로 나선다

  툭하면 숟가락 들고 밥주발 땡! 울리며 
  어머니께 주먹 날리던 아버지, 당신께도 
  이렇겐 더 못 산다는 아내에게도 레프트 훅!

  아차! 하는 그 순간 아랫도리 풀썩 한다
  두 팔은 바람개비처럼 핑그르~ 헛돌 뿐
  퍽 한 방 카운터펀치, 쓰러진 복서의 꿈은

  오늘 저녁 아버지와 반주 한 잔은 어떨지
  마지막 라운드를 아내와 뜨겁게 치르고
  혼곤히 단잠 들고만 싶었는지 모른다.

  —『오늘의 시조』 (오늘의시조시인회의, 2015)

 

  <해설>

  이 작품의 화자는 관찰자다. 어느 권투선수를 보니 ‘악으로 깡으로’ 권투를 한다. 성격도 고약하다. 그가 일격을 가할 인물의 순서가 정해져 있다. 1번은 다음 상대방, 2번은 챔피언, 3번은 나를 이겼던 놈……. 복서는 주먹 쓰기에 이력이 났다. 술을 걸치면 어머니를 때리곤 하던 아버지의 가슴에도, 아내의 면상에도 주먹을 날린다. 폐륜아요 폭력가장이다. 그런데 방심했다. 한 방 카운터펀치에 쓰러지고 말다니! 영원한 승자는 없는 법이다. 언젠가 마이크 타이슨이 KO패 당하는 것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보고는 내 생애에 이런 날이 다 있구나, 경악해 마지않았던 적이 있었다. KO승만 하던 타이슨이어서 그런지 이상하게 통쾌감을 느꼈었다. 
  관찰자인 시인이 권유한다.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오늘은 아버지와 식사하면서 반주로 술 한잔 하시라고. 아내를 때리지 말고 뜨거운 밤을 보내시라고. 구태의연한 시조가 문예지마다 즐비하게 실리는데 이 작품을 읽고는 ‘서사가 있는 시조가 나오기 시작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현대시조의 한 진경이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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