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71) / 아아 서역의 겨울! - 석미화의 ‘왕오천축국전’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71) / 아아 서역의 겨울! - 석미화의 ‘왕오천축국전’
  •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10.02 16:50
  • 댓글 0
  • 조회수 460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71) / 아아 서역의 겨울! - 석미화의 ‘왕오천축국전’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71) / 아아 서역의 겨울! - 석미화의 ‘왕오천축국전’

  왕오천축국전
   
  석미화 


  당신의 서신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장안에 파다했습니다 천년이 더 걸려 편지가 도착하고 이 나라엔 자꾸만 눈이 휘몰아쳤습니다 천년을 돌아온 길, 또 천년이 흐를까 봐, 나는 천안의 거처에서 새벽 눈을 뚫고 올라갔습니다 천안과 안서*까지의 거리가 꿈결인 듯 펼쳐진 능선은 끝도 시작도 없었습니다

  눈들의 집결지 안서는 당신이 도달한 곳 잠들지 않는 눈, 천수천안은 내가 이를 곳입니다 당신 눈 속의 천산은 두려움을 모르고 나의 눈물 속 물음은 적요를 모른 채

  당신의 전갈은 밤새 쌓이고 쌓었지요 눈은 거침없고 사방 흰 두루마리를 미리 펴주었습니다 몰아치는 눈발을 안섶에 여미고 가는 행적, 손을 뻗어 쓰다듬으면 되돌아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서역, 당신이 보았던 산마루 바라듯 그 남은 하루를 돌아들면

  또박또박 쓴 정자체들, 긴 밤 소사나무 위에 내린 눈발의 획들을, 행간마다 내려앉는 당신의 숨소리를, 그 나머진 못다 읽은 멀고 먼 폭설이었습니다

  안서(安西)에서 서안(西安)으로 흘러든 족적,
  어디서부터 어디에 이르렀다는 안서(雁書)의 시편들은 천안(天眼)을 휘돌고
  마지막 순례지를 지워버린 이국의 눈발 당신이 찾은 한 구절은 무엇이었나요

  이제 어디로 갈까요 조금 전까지 내 옆에 있던 그를 못 봤나요 아무도 없었어요 저녁 눈 속으로 들어갔나요 저기 어딘가 흰 산이 우는 소리 따라갔나요 

  *開元十五年十一月上旬 至安西: 개원 15년 11월 상순에 안서에 이르렀다. 

  —『시산맥』(2019년 가을호)

 

  <해설>

  제1연의 ‘천년’은 신라의 구법승 혜초(704〜787)가 쓴 『왕오천축국전』이 둔황의 막고굴에서 1908년에 프랑스인 펠리오가 찾아내 본국으로 보냈기에 그 시간적 거리를 가리킨다. 인도의 중국식 지명인 천축, 8세기 당시에는 다섯 개 나라로 나뉘어 있어 ‘오천축국’이었다. 인도만 돌아본 것이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40개국을 순례하면서 각국의 현황을 두루마리 양피지에 기록한 여행기가 천년이나 파손되지 않고 막고굴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는 것은 기적이요 불가사의다. 혜초는 안서도호부를 거쳐 장안으로 돌아와 인도어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사업을 하다가 고국 신라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죽었다. 시인은 여행기를 서신으로 간주하여 시를 전개해 나간다. 
  혜초는 중앙아시아의 북쪽을 눈보라를 헤치며 걷고 또 걸었다. 오로지 도보로 답파한 거리가 도대체 몇 만리였을까? 최소 2만 킬로미터였다. 바랑에 짊어진 두루마리 양피지와 벼루와 붓, 그리고 먹. 왜 그가 각국의 상황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은 것인지, 그 이유도 알 수 없다. 8세기경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대한 세계 유일의 기록이라는 혜초의 여행기. 시인은 혜초가 겪었을 추위를 생각한다. 『왕오천축국전』에는 5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그중 이런 것이 있다.

  차디찬 눈, 얼음까지 끌어모으고 
  찬바람, 땅 갈라져라 매섭게 분다
  망망대해 얼어붙어 단(壇)이 되었고
  강물은 제멋대로 벼랑을 갉아먹는다
  용문 지방은 폭포조차 얼어 끊기고
  우물 테두리는 도사린 뱀처럼 얼어붙었다
  (도반들과 함께) 횃불 들고 오르며 부르는 노래
  파미르고원을 어찌 넘어갈 수 있을까

  20대 초반의 신라 승려 혜초가 당나라에 얼마 머물지도 않고서 이렇게 멋진 오언율시 한시를 썼다는 것도 내겐 불가사의다. 폭설을 뚫고 갈 때 신은 신발은 짚신이었나 가죽신이었나. 잠은 어디서 잤을까. 무얼 먹고 그 험한 길로 나섰을까. 신라의 말과 서툰 중국어, 그리고 한자밖에 몰랐을 텐데 말은 제대로 통했을까. 아아, 40개국, 2만 킬로미터를 걸으면서 쓴 여행기『왕오천축국전』이 우리나라로 오면 국보가 될 텐데 프랑스는 내놓지 않는다. 시인은 1200년 전의 겨울을 노래하고 있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