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73) / 미친 사랑의 노래 - 진은영의 ‘신발장수의 노래’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73) / 미친 사랑의 노래 - 진은영의 ‘신발장수의 노래’
  •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10.0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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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73) / 미친 사랑의 노래 - 진은영의 ‘신발장수의 노래’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73) / 미친 사랑의 노래 - 진은영의 ‘신발장수의 노래’

  신발장수의 노래

  진은영


나는 원인을 찾으러 오지 않고 원인을 만들러 온 자
―기원전 387년, 헤라크산티페
저녁바람에 날아간 메모 중에서

  너는 모르지 네가 황급히 떨어뜨린 슬리퍼 한 짝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오늘밤도 종이 울리고 나는 네가 흘린 슬리퍼들을 주우러 다니지
  네가 뭘 보고 웃었는지 너는 잘 모르지

  나는 일러주러 왔다
  커다란 발을 가진 재미난 사내를 만들기 위해
  무한히 신발을 줍고 있는 밤이야

  다 가져도 좋아
  나의 젖은 손과 나의 취한 시간과 나의 목소리

  고장 난 시간들로 붐비는 시계를 좋아해 너는
  잘 돌아가는 빅벤을 열고
  작은 나사를 하나 던진다

  혁명의 텔로스는 빛나는 구름 위로 숨겨드렸지
  그러니 우린 그냥 지나가는 길에

  뻐꾸기들의 익살스런 울음을 위해
  5시 25분26분27분
  쉬지 않고 노래하는 새들의 빨갛게 젖은 깃털을 위해
  유리 숲으로 슬리퍼를 던지네 

  폭탄은 정각에 터지지 않네
  구름은 매일 흩어진다네

  그래도 저기 오는 가난한 유리장수
  손목에 한 번도 시계를 차본 적 없는 추억처럼
  나는 너를 사랑했네
  하나뿐인 흰 발을 사랑했네

  -『우리는 매일매일』(문학과지성사, 2008)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73) / 미친 사랑의 노래 - 진은영의 ‘신발장수의 노래’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해설>

  이토록 발랄한 상상을 누가 말릴 것인가. 신데렐라는 유리구두를 신었지만 지금 이 시대에는 슬리퍼를 잃어버리고서 슬리퍼를 찾아다닌다. ‘늘 그리워한다’거나 ‘다가가고 싶다’는 식의 사랑법은 전근대적인 것이고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다. 이 시대의 연애에서 중요한 법칙은 ‘행위’이다. 시집의 제목인 ‘우리는 매일매일’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은데, 아무래도 ‘사랑한다’나 ‘연애한다’는 동사가 제일 적당하지 않을까. 
  현대인의 사랑은 돌발적이거나 저돌적이다. 폭풍전야에 유리 숲으로 슬리퍼를 던지는 화자. 사랑은 매일매일 일촉즉발의 위기감, 불안감, 회의적인 시각……. 이런 것을 동반한다. “다 가져도 좋아”라고 말했지만 금방 후회하기도 한다. 그러다 또 왈칵 미워지기도 한다. 백년해로? 아아 끔찍해라.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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