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시인 50주기를 기념해 무료 상연되는 대학로 연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 민족 분단의 아픈 역사 그려
신동엽 시인 50주기를 기념해 무료 상연되는 대학로 연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 민족 분단의 아픈 역사 그려
  • 김보관 기자
  • 승인 2019.10.03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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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민중을 사랑한 시인 신동엽의 시와 함께 구현되는 생생한 장면
진달래 꽃 앞 지쳐 누운 주인공 [사진 = 김보관 기자]

꽃살이 튀는 산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그 입술에 파인 그늘” 삽입시 ‘진달래 산천’ 중에서.

진달래 꽃 아래 바위에 부딪힌 수류탄을 바라보는 주인공 [사진 = 김보관 기자]

[뉴스페이퍼 = 김보관 기자]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신동엽 시인은 ‘남한 최초의 저항 시인’으로 불리며 한국 참여 문학의 선봉으로 손꼽힌다. ‘진달래 산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껍데기는 가라’ 등으로 유명한 신동엽 시인의 50주기를 맞아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이 재현된다.

연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 장면 [사진 = 김보관 기자]

좋은희곡읽기모임이 주관하고 신동엽기념사업회와 신동엽문학관이 주최하는 대학로 연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은 동명의 신동엽 시극을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시와 극이 융합된 장르적 특징이 있다. 연극 중간중간 신동엽의 시가 함께 낭독되며 무대에 펼쳐지는 장면 속 감동이 한층 배가된다. 

전쟁 중 눈물을 흘리는 두 군인 [사진 = 김보관 기자]

극 중 6·25전쟁이 한창인 어느 봄날, 산중 계곡에서 조우한 두 군인은 예기치 못한 사이에 적이 되어있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산천 아래 자라온 두 남녀는 다친 상대를 차마 포로로 삼지 못한다.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도, 익숙한 물맛도 모두 그대로이건만 두 사람이 딛고 선 땅은 피폐해져 있다. 둘은 각각 허벅지와 손등에 상처를 입은 서로를 걱정하는 동시에 고향 땅에 남은 가족들과 이웃들을 그리워한다.

북한군을 맡은 김서정 배우(좌)와 남한군을 맡은 송의동 배우(우) [사진 = 김보관 기자]

대학로 연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은 때로 슬퍼 울거나 괴로워하다가도 실없는 농담에 즐거워하는 주인공들을 통해 전쟁이라는 비극 아래 놓인 인간의 나약함과 순수성을 통시에 그려낸다. ‘껍데기’로 표상되는 갖가지 폭력과 허상에 맞선 그들은 맞잡은 두 손끝에서나마 ‘통일’의 씨앗을 엿본다.

그러나 폭격을 퍼붓는 비행기와 탱크를 이겨내기엔 여린 손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잔혹함이 크다. 둘 중 어느 땅으로도 갈 수 없는 두 인물은 끝내 산천의 거름이 되어 동굴 안에 머물기를 소망하지만, 그마저 쉽지 않다.

신동엽 시인의 ‘산문시1’ 을 읽는 장면 [사진 = 김보관 기자]
신동엽 시인의 ‘산문시1’ 을 읽는 장면 [사진 = 김보관 기자]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후략)

-“그 입술에 파인 그늘” 삽입시 ‘산문시1’ 중에서.

연극 중간에는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글을 읽는 아이가 등장하기도 한다. 해맑은 목소리로 신동엽의 ‘산문시1’을 읽는 아이 곁으로 즐거워하는 이웃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동족상잔의 아픔이 없었다면 깨어지지 않았을 아름다운 미소다.

편지를 읽는 모습 [사진 = 김보관 기자]
편지를 읽는 모습 [사진 = 김보관 기자]

일상적인 장면 너머로 전쟁에 나간 가족이 그리워 눈물짓는 이들의 모습 또한 빠지지 않는다. 그들 곁에는 한쪽 팔을 잃고 ‘맞아 죽어버린 봄’을 노래하듯 울부짖는 귀향 군인이 있다.

연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 장면 [사진 = 김보관 기자]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발병 났다커니
봄은 위독(危篤)하다커니

(중략)

그렇지만 눈이 휘둥그래진 새 수소문에 의하면
봄은 뒷동산 바위 밑에, 마을 앞 개울
근처에, 그리고 누구네 집 울타리 밑에도,
몇 날 밤 우리들 모르는 새에 이미 숨어와서
몸 단장(丹粧)들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 입술에 파인 그늘” 삽입시 ‘봄의 소식’ 중에서.

비슷한 얼굴을 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눠야 하는 현실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올해는 신동엽의 50주기인 동시에 남북정상회담, 판문점 회동, 한일 갈등 등이 점철된 해이다. 이러한 사회 현실 속에서 신동엽의 작품은 여전히 생생한 가치를 갖는다.

그가 찾던, 마을 사람들이 쑥덕거리던 ‘봄’은 어쩌면 아직도 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봄이 ‘자살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봄은 ‘잠시 쉬고 있는 중’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혼란한 시대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늘’ 속에 가려진 민족의 아픔과 상처를 잊지 않는 것이다.

연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 장면 [사진 = 김보관 기자]
연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 장면 [사진 = 김보관 기자]

대학로 공유 소극장에서 상연되는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은 아름다운 무대와 음향, 감동적인 시편들을 통해 관객들에게 감동과 울림을 선사한다.

한민족의 상처와 비극을 노래한 공연은 대학로에서 연극을 찾는 누구나 무료로 관람 가능하며 지난 10월 1일 화요일부터 오는 10월 6일 일요일까지 무대에 오를 계획이다. 평일은 오후 8시, 개천절을 포함한 공휴일은 오후 4시에 예정되어 있다. 관련 문의는 조연출을 맡은 박지훈(010-9798-3382)에게 하면 된다. 

시체를 묻는 노인과 만난 두 군인 [사진 = 김보관 기자]
시체를 묻는 노인과 만난 두 군인 [사진 = 김보관 기자]

한편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은 1966년 최일수 연출, 최불암 주연으로 국립극장에서 상연된 이후 1998년 동숭아트 소극장에서 오세황 연출로, 2005년 안치환 공연과 김석만 연출로 다시 무대에 오른 바 있다. 이번에 다시 태어난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은 장용철이 연출을 맡았으며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후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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