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훈 칼럼] 산업혁명과 매스 커뮤니케이션 저널리즘으로서 신문의 탄생
[공병훈 칼럼] 산업혁명과 매스 커뮤니케이션 저널리즘으로서 신문의 탄생
  • 공병훈 교수
  • 승인 2019.10.08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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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산업혁명과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출현
기계와 동력 발전 그리고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대량 생산이 가능해져 가족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경제 단위가 되었으며 저렴한 상품이 대량으로 공급되고 가내 수공업이 침식되었다. 도시 인구가 증가하면서 가정의 독립적인 생산은 불가능해지고, 대량 생산된 제품의 소비가 증가하면서 제조업자들은 제품을 알려야 하는 중요성은 인식한다. 뿐만 아니라 교통 발달로 먼 거리의 장소에까지 제품을 전달하고 마케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다.

산업혁명은 백화점과 체인점 같은 새로운 형태의 소매점을 등장시켜 소비와 사회경제적 지위를 드러내고 사회 전반에 소비 열망을 확산시켰다. 산업혁명이 만든 변화에 알맞은 광고를 위해서는, 조직화되지 않은 일반 대중에게 대량의 정보와 이슈를 전달하는 매스 미디어가 필요했다. 최초의 매스미디어는 신문의 형태를 띠었다. 또한 광고는 신문의 재정적 기반을 제공하여 매스미디어가 존속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매스 미디어(mass media)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수단 또는 기술을 뜻한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대중전달 과정 또는 사회현상을 뜻한다면 매스 미디어는 불특정 다수인 대중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적인 기술 수단을 말한다. 이 기술의 사용목적이나 전달 내용이 공적인 성향을 띠는 경우에 한해 매스 미디어라고 한다. 매스 미디어는 산업화·도시화·근대화로 인한 사회환경의 확대와 정보량의 증가, 신속한 정보 입수를 통해 급속하게 변화하는 사회환경에 적응하려는 사회적 필요에 따라 발전해왔다.

매스 커뮤니케이션(mass communication)은 송신자와 수신자 간의 물리적 거리를 두고 기술적인 미디어 수단을 통해 불특정 다수의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공적 메시지나 정보의 일방적 전달 과정 또는 그 사회현상을 의미한다. 송신자는 신문사·출판사·방송국 등을 가리킨다. 영어로 매스(mass)는 ‘대중’ 또는 ‘대량’을 뜻하며,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은 ‘공유하다’, ‘전달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어의적으로 본다면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대중전달’ 또는 ‘대량 전달’을 뜻한다.

인쇄기술이 신문 산업과 결합되면서 뉴스의 대량생산체제가 인쇄기는 뉴스 전파가 새로운 비즈니스로서 자리 잡게 만들었다. 신문 이전의 뉴스 미디어는 말을 전달하는 또는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하지만 신문은 이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했고 뉴스와 비즈니스 사이의 공생관계가 형성되었다. 
 

『램스 혼』(Ram’s Horn)의 편집인 역할을 맡았던 노예 출신인 프레더릭 더글러스

하지만 뉴스는 사회를 결속시키는 기능이 있었다. 미국의 독립혁명 시기 영국의 인지 조례에 저항하여 미국의 모든 신문은 인지세를 납부하느니 차라리 신문을 폐간하겠다고 선언하면서 폐간 임박이라는 기사를 내보낸다. 식민지이던 시대 미국에서 신문을 발행하기 위해서는 인지를 붙여야 했다. 영국의 허가가 없이는 발행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1787년 이전인 1765년 즈음부터는 인지를 붙이지 않고 발행하는 신문들이 늘어났다. 자연스럽게 불법으로 발행된 신문들은 급진적인 성격을 띠었다. 이 신문들에서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지배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주장들이 실렸다. 흑인 윌리엄 호지스(Willis A. Hodges)는 흑인 목소리를 담기 위한 신문으로서 『램스 혼』(The Ram’s Horn)를 창간했으며 노예 출신인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가 편집인 역할을 맡았다. 물론 1년에 2500부 정도 판매되었지만 소수 집단을 위한 신문으로서 의미 있는 출발로 볼 수 있다.

신문들은 독자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여기에 영향을 끼치는 역할을 한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한창이던 시기에 파리에서는 4개이던 신문이 335개로 늘어났고 제호만 보더라도 『시민의 친구(L’Ami du citoyen)』, 『왕의 친구(L’Ami du roi)』, 『혁명의 친구(L’Ami du la révolution)』, 『헌법의 친구(L’Ami du la constitution)』, 『인민의 친구(L’Ami du pueple)』 등으로서 혁명을 주도하는 힘들 중 하나였다.  

프랑스 혁명의 혼란에서 탁월한 군사적 재능으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끈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1821)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후 신문의 자유를 폐지하고 반대파의 신문을 침묵시키고 자신의 명령하에 놓인 신문만이 여론을 이끌고 영향력을 미치게 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물결 속에 가장 공격적인 성향을 보인 『인민의 친구(L’Ami du pueple)』를 창간한 장 폴 마라(Jean-Paul Marat)는 암살되고 그의 피가 묻은 신문이 전해진다. 

장 폴 마라(Jean-Paul Marat)의 피가 묻은 채 전해지는 신문 『인민의 친구(L’Ami du pueple)』

유럽의 혁명운동의 도화선이 된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 직후인 1842년에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가 『라인 신문(Rheinische Zeitung)』의 편집에 참가한 뒤 주필이 되어 이 신문을 혁명적 민주주의의 기관지로 바꾸어 놓았다. 이 활동은 정치 신문의 확산과 선전, 선동 방식의 전형이 된다. 1843년 프러시아의 국가 검열에 의해 폐간되던 당시의 신문의 정치 삽화에서는 마르크스를 신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어 독수리에게 영원히 심장을 쪼아 먹히는 그리스 신 프로메테우스가 인쇄기에 묶여 있는 장면이 나온다.   

1843년 프러시아 신문의 정치 삽화

근대 저널리즘의 탄생
특파원을 파견시켜 뉴스원으로 삼던 1815년에는 브뤼셀 부근 사건을 런던에 전달하는 데 보통 4일이 걸렸다. 철도와 전보 같은 다른 통신 수단의 개선은 취재기자의 시간·공간 개념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철도망 발달로 기자들이 목적지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어서, 신문 배달도 원활하게 되자 신문은 대중적인 일상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수도에 본부를 둔 거대 신문들이 교통 발달에 광범위한 지역에 신속한 배포·배달이 가능해지면서 전국지로 성장하였다.

19세기에 신문기자 직업이 훨씬 더 전문적인 직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초창기의 언론인은 혼자서 기사를 작성·편집·인쇄했으나 신문이 성장함에 따라, 기사 취재를 주 업무로 하는 전업 기자가 대거 채용되었다. 최초의 종군기자 가운데 1명이었던 『타임스(Times)』의 윌리엄 러셀(William Russell)은 크림 전쟁(Crimean War, 1853-56)에 파견되었는데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크림반도에서 간호를 하기로 결심했던 것은 바로 그의 기사를 읽고 나서였다고 한다. 미국의 남북전쟁(1861~65)에는 150명이 넘는 종군기자가 파견되었다. 종군기자들은 전쟁터에서 열띤 취재 경쟁을 벌여 전쟁의 참혹성을 고발했으며, 평화 시에는 현장기자들이 과감한 특종기사로 영웅이나 유명 인사가 되기도 했다.

크림 전쟁을 다룬 『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9세기 초 유럽이나 미국의 교육받은 시민계층은 비밀 신문의 형태지만, 객관적 뉴스 보도와 정치 논평을 접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작가나 편집인에 의해 정론지의 기본 형태가 갖추어졌고, 선정적이기는 하지만 상업적으로 성공한 대중지가 탄생했다. 19세기 말 미국과 영국에서는 근대적 형태의 신문사와 제작 양식이 확립되었다.

19세기 미국과 페니 프레스 등장
19세기 미국의  변화를 살펴보면 1800년에 수도가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으로 이전하고 뉴욕이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1830년에 루이지애나 지역을 프랑스로부터 매입하여 저널리즘이 서부로 확대되었으며 미국은 1848년 멕시코와 싸워 캘리포니아 지역을 획득한다. 이 시기 미국의 신문 종수는 260종에서 1,200종으로 증가한다.

뉴욕의 『데일리 애드버타이저(Daily Advertiser)』, 『커머셜 애드버타이저(Commercial Advertiser)』,  『머컨틸 애드버타이저(Mercantile Advertiser)』 등의 상업지가 지명도가 높았으며 이 시대 미국은 상업신문과 정치 신문의 색채가 분명했다. 보통 신문은 지면의 반 정도가 광고였는데 산업 신문 가운데는 80~90%까지 광고로 채워진 것도 있었으며 광고에는 간단한 컷을 넣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광고주를 미국에서는 내셔널 애드버타이저(national advertiser)로 불렀다. 1801년에 창간된 뉴욕의 『이브닝 포스트』는 문예적인 성격의 신문으로서 “독자에게 신문 용지를 공급하는 것은 광고주이다”라고 신문에 광고 수입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밝혔다. 하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극장과 복권의 광고를 거절하거나 경영주의 원칙에 따라 사기 의약품 광고를 싣지 않는 『저널 오브 커머스』 등도 있었다.

하지만 1830년에서 1900년에 이르는 시기는 미국이 남북전쟁을 끝내고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던 때이다. 먹고살기 위한 경쟁으로 내몰린 어린 소년들에게 현실은 가혹하기만 했다. 피곤함의 자취가 역력하게 남아있는 어린아이의 사진으로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산업혁명이 눈부신 약진을 이루면서, 기업들의 독점화 현상이 나타났고 산업이 발달한 결과 각지에 공업도시가 발달했다. 따라서 지방의 농업 인구들이 도시 노동자로 급속하게 유입됐습니다. 이후 빈부격차로 인해 슬럼가 등지에서 범죄 발생이 사회문제로 떠올랐으며 노동자들의 활동 범위도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역사학자들은 1840년 미국에서 교육받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난 게 가장 높은 독자층을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페니 프레스(penny press)의 출현은 신문 근대화의 전환기로 평가된다. 시민과 노동자들이 신문을 구매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가격이 형성됨에 따라 신문이 최초의  매스미디어(massmedia)로서 거듭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1센트 신문을 페니 프레스라고 불렀는데 1센트 신문은 미국이 당시 대공황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태어난 산물이다. 1센트 신문의 시작은 1830년 7월 보스턴에서 창간된 린드 윌터(Lynde Walter)의 『데일리 이브닝 트랜스크립트(Daily Evening Transcript)』였다. 당시에 1센트 신문을 “페니 프레스(penny press)”라고 불렀다.

1883년에 창간되어 1센트 신문으로 처음 성공한 『더 선(The Sun)』

하지만 1센트 신문이 처음 성공시킨 건 벤자민 데이(Benjamin Henry Day, 1810-89)였다.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춘다”라는 모토를 가진 『더 선(The Sun)』은 1833년에 창간된다. 이 신문은 “광고가 늘어나면 지면을 눌리지만 신문 가격을 올리지 않는다"라는 사고(社告)를 내고 “선불로 연간 계약을 하지 않는 광고를 싣지 않겠다”라는 방침을 밝혔다. 이 신문을 기점으로 신문이 대중화되며 이는 종이 생산과 인쇄 그리고 전보 기술의 발명 등에 힘입어 탄생되었으며 싼 가격 덕분에 보통의 사람들이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배경에 1830년대부터 의무교육이 보편화되고 19세기 공업화가 이룬 경제적 발전을 통해 의식주가 향상되고 교육을 받은 대중들이 스스로를 경제와 정치의 주체로 인식하기 시작한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페니 프레스 신문을 배달하는 소년

사진의 소년은 5살 전후일 것으로 보인다. 『더 선』은 가두판매 소년들에게 100부에 선불로 지급하면 60센트, 후불이면 75센트에 신문을 넘겼다고 한다. 이에 소년들은 점차 선불을 선택했고 소년들은 예약자에게 신문을 배달해 주고 1주에 6센트를 받았다. 사진의 소년은 5살 전후일 것 같다. 이 소년은 100부를 처음에 받아서 팔기 시작했을 텐데, 사신 속 소년이 안고 있는 신문은 이제 20부도 채 남지 않은 듯하다. 소년의 미소에는 선불로 낸 금액 이상의 신문 부수를 모두 판 데 대한 뿌듯함이 담겨 있다.

페니 프레스는 정보 발표문, 대통령 연설문, 국회의원 편지 등을 뉴스로서 수집하여 신문을 만들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사람을 고용하여 뉴스를 취재하고 경찰, 스포츠, 종교, 금융 등 대중이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들을 다룬다. 뉴스의 초점이 부유한 엘리트층의 관심사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중산층의 일상생활로 옮겨진다. 신문의 보급 방식도 선불 구독료를 사용하거나 완전히 바뀐다, 가두판매를 벌이는 등의 변화가 있었으며 매스 미디어로서 신문이 경제적 기반을 구독료가 아닌 광고료로 바꾸는 과정이다.

1890년대 페니 프레스 신문의 광고 지면

벤저민 데이의 『더 선』은 다른 신문들과 같이 광고료를 받으면서도 각 광고 지면을 대폭 축소하는 방법을 통해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한다. 매스 미디어 신문의 종류가 증가하다 광고주들은 신문 선택, 광고료 협상, 인쇄업자 감독, 광고 게재 여부 확인, 비용 입금 등의 여러 과정을 대행할 광고 대행업이 시작되는 계기가 된다.

4개월 만에 『더 선』은 하루에 5,000부씩 판매되었고 1834년 11월 『선』은 날마다 1만 부를 발행하고, 1836년에는 연간 2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으며 부수도 3만 부로 늘었다. 당시 영국의 한두 개 신문을 제외하고는 미국에서 최고의 보급률을 가진 신문되었다. 1840년 미국 전체에서 발행되는 신문이 1,631종이었으며 10년 후인 1850년 통계에 따르면 일간과 주간 신문의 총수는 2,302종으로 1주일에 500만 부를 인쇄하는 수준이었다.

신문의 두 가지 모델과 페니 프레스
신문에는 두 가지 수익 모델이 있다. 한 가지는 기업인들이 자신이 판매하고자 하는 상품을 널리 알리고자 신문에 광고를 싣고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서민 독자들이 구독과 구매를 통해 신문 발행 부수를 늘리는 것이다. 절대다수 서민 독자들이 신문을 읽기 때문에 광고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벤자민 데이가 페니 프레스를 통해 이룬 혁신은 바로 이 지점에 있었던 것이다.

1센트를 지금 환율로 계산하자면 얼마일까.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임금이 75센트였고 보통 신문 한 부에 6센트 이상이었으니 서민들을 독자로 할 수 없었다. 일당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인 것입니다. 최근 일용직 아르바이트 일당이 4만 4천 원 정도 하는 것을 기준으로 보자면 신문 한 부에 4,400원 정도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1센트 신문이라면 600원 정도 하는 금액이다.

당시 신문사들이 상업신문과 페니 프레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배경이다. 벤자민 데이는 기묘한 범죄 뉴스와 흥미로운 뉴스를 적절히 섞고 가격을 1센트로 낮추어 독자를 증가시킨다. 신문이 상업적 목적을 위한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값싸고 대중적인 신문을 만들겠다는 벤자민 데이의 전략은 뉴욕과 다른 도시로 확산된다. 페니 프레스를 비웃던 이들에 의해 필라델피아의 『퍼블릭 레저』(Public Ledger)와 『볼티모어 선』(Baltimore Sun)이 발행된다. 

페니 프레스들은 도시에 살고 있는 기능공, 노동자 같은 서민층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증가하는 신문 판매 부수 덕분에 신문 편집인들은 정치인을 비롯한 투자자들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고 신문사들이 절대다수인 서민들의 입장에서 객관성을 지닌 뉴스를 다루는 중요한 분기점이 마련된다. 그리고 그 분기점을 폭발시킨 것은 바로 뉴욕의 신문 배달부 소년들이었던 것이다. 『선』(The Sun)의 모토인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춘다”처럼.

 

 

 

공병훈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문예커뮤니케이션학회 학회장.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서 앱(App) 가치 네트워크의 지식 생태계 모델 연구에 대한 박사논문을 썼다.주요 연구 분야는 미디어 비즈니스, PR, 지식 생태계이며 저서로는 『4차산업혁명 상식사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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