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79) / 물에 밥을 말아 - 허림의 ‘숭늉’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79) / 물에 밥을 말아 - 허림의 ‘숭늉’
  •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10.10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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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79) / 물에 밥을 말아 - 허림의 ‘숭늉’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79) / 물에 밥을 말아 - 허림의 ‘숭늉’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79) / 물에 밥을 말아 - 허림의 ‘숭늉’

  숭늉 

  허림  


  적설의 무게가 고요하고 희고 부시고 환한 것을

  눈도 크게 뜨지 못하고 옆착에 손을 넣고 가래알을 주물럭거리며 돌처럼 딱딱한 마른 밤을 우물거리며 괜한 우체부를 기다리는 것인데

  까마득한 한 소식도 올 것만 같다

  잘 듣지 못하는 어머이는 또 딴소리를 하고 나는 물에 밥을 말아 들기름에 깨보셍이에 짭짤하게 볶은 무짱아찌를 얹어 한 끼 때운다 

  이 한 끼 속에는 백제나 신라 여인의 희고 보드라운 살 냄새가 난다

  —『시와소금』 (2017년 봄호)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79) / 물에 밥을 말아 - 허림의 ‘숭늉’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해설>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난 허림 시인이 쓴 시여서 그런지 “적설의 무게”가 서울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눈이 많이 내린 날(허구한 날 눈이 오겠지만) 화자는 우체부를 기다리고 있다. 도회지의 소식이 궁금할 정도로 외롭기 때문이다. 옆착(염낭,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가래의 열매[核果]를 주물럭거리고, 딱딱한 밤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것도 다 외롭고 심심하기 때문이다. 
  밥 먹을 때가 되어 물에 밥을 말아 먹는다. 들기름에 깨소금을 넣고 짭짤하게 볶은 무장아찌를 얹어 밥을 한 끼 때우는데, 이 한 끼는 백제나 신라사람도 먹었을 그 토속적인 음식이리라. 숭늉 같은 밥에서 희고 보드라운 여인의 살 냄새를 맡은 이유가 있다. 화자의 곁에는 안아볼 여인이 없고 귀가 어두운 늙은 어머니가 있을 따름이다. 아, 이제 알겠다, 이 시의 화자는 까마득히 먼 도시의 여인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까마득한 한 소식은 오지 않는다. 어머니는 또 딴소리를 하는데, 아마도 장가를 가라느니, 여자를 좀 사귀라느니 하는 말일 것이다. 이메일이며 카톡이 없던 시절에는 우체부를 하루 종일 기다리며 보낸 이들이 많았다. 나도 그랬었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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