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 시인 특집] 좋은 시 16. 유기 - 류휘석 시인
[신인 시인 특집] 좋은 시 16. 유기 - 류휘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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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0.10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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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페이퍼에서는 데뷔 5년 미만의 신인 시인들 중, 작품이 뛰어난 시인을 선정하여 미발표 신작 시와 시에 관한 짧은 단상, 에세이 등을 연재합니다. 시인들의 시 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유기


  빈 가방을 들고 돌아온 너와 술을 마셨다
  지루하게 늘어진 서로의 얼굴이 테이블을 더럽혔다 

  자꾸 아픈 얘기를 해서 얼마나 벌고 얼마나 힘들고 그런 걸 말하게 돼서 시가 세상에서 제일 짧은 병명이 돼 버려서
  거기까지 말했을 때 나는 내가 제일 아프다고 말했다 
  그래서 너는 아직 쓰는구나 잘 몰라서 모르는 척에 능해서

 자리를 옮길까?
 그래 여기까지만 하자

  우리는 계단 중간쯤에서 두고 온 신분증이 떠올랐다 여기까지 오는 데 정말 오래 걸렸지 힘들기도 많이 힘들었다 그렇지만 
  등 뒤에는 난간을 붙잡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비키라고 이름이 없으면 돌아가라고 화가 난 채로 웅성거렸다

  계단 끝에는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다음을 빼앗긴 우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정류장에 앉아 횡단보도를 바라보았다 
   건너야지 
   너 가는 거 보고 
  횡단보도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사람들은 빛 하나를 노려보며 다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뭐가 있지도 않겠지만 거기에는 죽을 일도 없겠지

  죽지 않을 만큼만 다음을 생각하는 우리가 멀리서 도착하고 있었다 
 
   있잖아 나 이제는 누가 죽어야 쓸 수 있을 것 같아 
   뭘? 
   그러니까
   다음에는 죽어서 만나자 

  너는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를 발로 차며 말했다 잔잔하게 누워 흐르던 우리는 순식간에 공중으로 터져나갔다 
  천천히 신호가 바뀌고 
  사람들이 다 건너는 동안 
  부서진 얼굴이 거리를 뒤덮었다

  아무런 마음도 없는 곳에 아무렇게나 흩어진 우리는
  죽음으로 시작되는 가능성을 나열하며 시간이 빨리 지나가버리길 바라고 있었다

  이게 우리들의 문제다 화가 난 채로 시작하고 착해져서 돌아오는 얼굴이

  우리는 의자에 흐른 얼굴을 주섬주섬 모아 주머니에 넣었다 
  돌아가는 길에 각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고 싶어

  그런 말을 하고

  목이 마른 채로 잠에 들었다
  사랑하는 것들이 빨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시작노트

세상에는 단 하나도 같은 사람이 없는데 왜 이야기는 모두 비슷할까. 지구를 밟고 마주 선 너와 나는 왜 이름을 두고 자꾸 우리라고 부르는 걸까. 지구가 기울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그러나 우리라는 것은 아무리 조심해도 넘어지기 마련이다. 포개진 우리의 바깥에 너무 많은 여백이 남을 걸 알면서. 그게 우리를 외롭게 만드는 걸 알면서. 나도. 나도. 손을 들면서. 다 같이 넘어지고. 다 같이 일어서고. 까진 무릎을 서로 가려주면서.

그러니까, 그래서,
우리를 우리라고 부르면 덜 외로운 기분이 든다.

류휘석 시인.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19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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