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88) / 아픔과 슬픔 - 공순복의 ‘고구마순이 말한다’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88) / 아픔과 슬픔 - 공순복의 ‘고구마순이 말한다’
  •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10.19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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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88) / 아픔과 슬픔 - 공순복의 ‘고구마순이 말한다’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88) / 아픔과 슬픔 - 공순복의 ‘고구마순이 말한다’

  고구마순이 말한다

  공순복
 

  돌다리 건너듯 발걸음 내딛는 
  아흔한 살 심장 전문의 B씨
  치매병동에 자신을 부려놓은 지 서너 해 되었다

  창가에 놓인 고구마순이
  허공을 향해
  시간의 태엽을 감고 있다

  고구마순 사이로 세상을 내다보는 노인
  아무래도 줄어들지 않는 입과 수저의 거리
  화장실은 신대륙으로 가는 길만큼 멀고

  어느덧 나중 배운 영어는 잊어버리고
  배냇말인 독일어만 게워낸다
  흑백사진 속에 갇힌 이민자의 역사

  마지막 바람 하나
  아내와 같이
  오래 같이 있고 싶어……

  ―『배내옷』(도서출판 세시, 2015)

 

  <해설>

  공순복 시인은 『배내옷』이란 시집을 낸 호주 교민 시인이다. 시 속의 B씨는 실존인물이라고 여겨진다. 독일 태생인 B씨는 호주에서 심장 전문의로 살다가 은퇴한 분인 모양이다. 아흔한 살 나이가 되도록 산 것이 욕된 일일까, 치매환자가 되어 화장실 출입도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사람은 요절하고 어떤 사람은 장수한다. 치매환자라도 생명력 하나는 놀라울 정도다. 마치 창가에 놓인 고구마순이 허공을 향해 “시간의 태엽을 감고 있”듯이 악착같이 살려고 한다. 호주에서의 삶을 가능케 한 영어로는 말하지 않고 아주 예전에 떠나온 독일의 언어로 말한다. 

  B씨의 소원은 오직 하나다. 아내와 같이 오래 있고 싶다는 것. 그러나 그 소원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A와 B가 같이 있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한 경우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행복을 잘 모른다. 가족 간에도 아옹다옹하고 티격태격한다. 별 일 아닌데도 울화 앙앙하고 분기탱천한다. 
고구마순과 같은 생명력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리라. 적당한 시점에 죽는 것도 복인데 현대의학이 살려놓은 목숨이 시간의 태엽을 감고 또 감는다. 치매노인 중에는 화장실에 가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음식을 더욱 밝히는 경우도 있다. 아아, 훗날 나의 모습이 아닐까. 생의 비극성을 담담히, 고구마순이 말하듯 말하니까 시가 더욱 슬프고 아프다. 

  조용히 슬프고, 깊이 아프다. 목숨을 부지한다는 것이. 타인에 의한 안락사가 타살이면 자신이 택한 존엄사는 자살일 텐데 어느 것이 옳은지 분간이 안 간다. 삶과 죽음의 거리는 멀지만 입과 수저의 거리는 가깝다. 살아 있는 한 먹어야 하는 것.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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