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90) / 꿈속의 아이 - 송희복의 ‘슬픈 꼭두각시’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90) / 꿈속의 아이 - 송희복의 ‘슬픈 꼭두각시’
  •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10.2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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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90) / 꿈속의 아이 - 송희복의 ‘슬픈 꼭두각시’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90) / 꿈속의 아이 - 송희복의 ‘슬픈 꼭두각시’

  슬픈 꼭두각시

  송희복


  구십 년대 초였는지 모른다.
  나는 결혼할 상대가 정해지기도 전에
  딸아이의 이름을 미리 지어 놓았다. 
  연꽃 연 자에 구슬 옥자인 연옥(蓮玉)이었다.
  연꽃처럼 예쁘게, 구슬처럼 맑고 여물게 살아라,
  뜻도 뜻이지만 여녹이라는 발음이 무척 좋았었다.
  이런 생각이 어느 날 무심코 떠올랐다.
  내가 아내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아내는
  연옥이란 이름이 너무 촌스럽다고 한다.
  그로부터 아마 한 달 정도 지났나 보다.
  꿈속의 나는 시골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벤치 옆자리에 대학교 삼사 학년쯤 돼 보이는 
  처녀아이가 앉아 있었다. 얼굴은 화장기가 
  없이 곱다랗고, 머리카락은 기름하게 묶여졌고, 
  옷은 흰 원피스로 잘 차려 입었다. 내가 몰래 흘깃
  곁눈질하는 순간에, 처녀아이는 내 손등을 툭 치면서
  두 입술을 힘차게 붙였다 떼며 압빠, 하고 불렀다.
  꿈속의 얘기를 아내에게 대수롭지 않게 말했더니,
  아, 당신 연옥이를 만났네, 하며 
  아내는 나에게 우스갯소릴 했다.
  하기야 그 무렵에 연옥이가 태어났다면 지금쯤
  스물두어 살이 되었을 나이다. 아무래도 내게
  연옥이는 태어나지 아니한 딸을 위한
  주인 없는 이름이다. 내 마음속에
  숨어 있는 슬픈 꼭두각시다. 

  -『경주의 가을을 걸으면』 (작가세계, 2015)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90) / 꿈속의 아이 - 송희복의 ‘슬픈 꼭두각시’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해설>

  시인은 총각 시절인 90년대 초, 훗날 결혼하여 아이를 낳게 되면 그 아이의 이름을 ‘연옥’이라고 부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고 한다. 연꽃 연자에 구슬 옥자인 연옥은 ‘여녹’이라는 발음도 좋아 마음에 계속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결혼 후 이 이야기를 아내에게 하자 이름이 촌스럽다고 퉁을 놓았나 보다. 이야기를 나누고 한 달 후에 송 시인은 꿈을 꾸게 된다. 시인은 태어나지도 않은 딸을 꿈속에서 만났던 것이며, 그 딸이 ‘압빠’ 하고 불렀다고 하니, 꿈에서 깨어나 얼마나 허전하고 아쉬웠을까. 마침 딸의 이름을 지어놓은 때로부터 세어보니 딸이 그 무렵에 태어났더라면 스물 두어 살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에 더더욱 서글픈 감회에 사로잡히게 된다. 연옥이는 “태어나지 아니한 딸을 위한/ 주인 없는 이름”이며 “숨어 있는 슬픈 꼭두각시”다. 

  시인은 19세기 초 영국의 찰스 램처럼 환상(혹은 꿈속)에서밖에 만날 수 없는 딸을 등장시켜 시를 써본 것이다. 시인은 슬하에 자녀가 없는 것으로 아는데, 그래서 ‘딸’에 대한 갈망이나 그리움이 자녀를 둔 사람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 큰 것일 터. 꿈속에서 딸 연옥을 만난 이후에 그 아이가 “내 마음속에/ 숨어 있는 슬픈 꼭두각시”임을 깨닫고 이 시를 썼던 것이 아닐까. 꼭두각시는 원래 꼭두각시놀음에 나오는, 여러 모양의 이상야릇한 탈을 씌운 인형이거나 남의 조종에 따라 주체성 없이 움직이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이 시에서는 조금 뜻이 다른 듯하다.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내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슬픈 꼭두각시는 바로 ‘꿈속에서 만난 딸’이다. 꿈에서 깨어나면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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