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93) / 사랑과 자살 - 윤향기의 ‘To. 잔느 에뷔테른’
To. 잔느 에뷔테른
-당신, 그려도 될까요? From. 모딜리아니
윤향기
1. 사랑
캔버스에
당신의 알맞은 온기와 바라보기 좋은 눈빛과
내 높이에 꼭 맞는 긴 목과
우수에 찬 분위기를 그립니다
머리카락 곱게 늘어트려 내 어깨에 잠드는
당신
2. 죽음
사랑스런 저녁별
나의 이그드라실, 당신 잘 있지요
수많은 여인들을 배신하게 하고
당신의 신성한 보호를 받았던 나의
마지막 인사를 받아주오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빛을 건네준 별, 당신에게
아득하여 닿을 수 없는
지상의 사랑을 전송하게 되는 마지막 행복
3. 다시 사랑
온갖 지붕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니스의 창밖으로 뛰어내려
천국에서도 나의 모델이 되기 위해 맨발로 걸어온
당신
이제 나는 하늘의 축복을 받은
당신의 순결한 날개와
당신의 순정한 물방울과
당신의 달콤한 목소리를 섞어 물감을 풀어도 될ㆍ까ㆍ요?
-『시산맥』 (2009. 상반기)

<해설>
고조선 시대, 백수광부는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취한 상태로 강을 건너다 빠져 죽고 말았다. 남편이 어이없이 죽어버리자 아내는 강가에서 노래를 한 곡조 뽑더니 자기도 물에 뛰어들어 죽고 말았다. 뱃사공 곽리자고는 그 노래를 듣고 집에 와서 아내 여옥에게 들려주었고, 바로 그 노래가 ‘공무도하가’다. 여옥은 이웃집에 사는 가수 여용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었고, 여용을 통해 이 노래가 널리 퍼져나갔다고 한다.
서양에도 남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따라 죽은 아내가 있었다. 화가 모딜리아니의 아내 잔느 에뷔테른은 남편이 폐결핵으로 죽은 다음날, 임신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건물에서 뛰어내려 투신자살했다. 이 시는 저승의 모딜리아니가 아내 잔느에게 쓰는 편지 식으로 전개된다.
‘1. 사랑’은 서로를 열렬히 사랑했던 살아생전을 생각하며 쓴 편지이다. ‘2. 죽음’은 모딜리아니가 숨을 거두면서 잔느에게 한 말이라고 생각하여 쓴 부분이 있다. 그리고 저승에 간 영혼으로서 잔느에게 이런 말을 했을 것이라고 시인이 상상하며 쓴 편지도 제시한다. 그렇게 이별을 고했지만 잔느는 남편 없는 세상을 견딜 수 없었다. 모딜리아니는 “온갖 지붕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니스의 창밖으로 뛰어내려/ 천국에서도 나의 모델이 되기 위해 맨발로 걸어온” 아내를 맞이한다. 시인은 죽음이 갈라놓지 못한 두 사람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다. 부부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이 자식에 대해서, 양가의 부모에 대해서, 뱃속의 아기에 대해서, 그리고 자살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잔느는 죄를 지은 것이다. 하지만 하루 만에 ‘다시 사랑’을 이루었기에 적어도 모딜리아니에게 있어서는 “당신의 순결한 날개”와 “순정한 물방울”과 “달콤한 목소리”는 하늘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시인은 남편을 향한 아내의 광적인 사랑에 대해 면죄부를 주었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