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00) / 시인의 용기 - 김지하의 ‘벽’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00) / 시인의 용기 - 김지하의 ‘벽’
  •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10.31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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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00) / 시인의 용기 - 김지하의 ‘벽’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00) / 시인의 용기 - 김지하의 ‘벽’

  벽

  김지하


  벽 
  그것뿐
  있는 것은 그것 하나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
  벽
  그것뿐
  내 마음에 
  내 몸에 몸 둘레에
  너와 나 사이 모든 우리들 사이
  벽
  다시 벽
  네 이름을 쓰는 
  내 그리움을 눌러서 쓰는
  벽
  붉은 벽
  옛날 훗날 
  꿈길도 헛것도 아닌 바로 지금 여기 
  내 마음이 네 가슴속에 
  네 몸속에 내 살덩이가
  파고들어 파고들어 끝없이 파고들어
  기어이 본디는 
  하나임이 화안이 드러나 열리는 
  자유, 열리는  
  눈부신 빛무리 속의 아침바다
  그것을 손톱으로 쓰는
  그것을 흐느낌으로 우리가 쓰는 
  온몸으로 매일 쓰는
  벽
  네 이름을 쓰는
  내 그리움을 눌러서 쓰는
  벽
  그것은 이미 우리 앞에 없다.

  -『애린 1』 (실천문학사, 1986)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00) / 시인의 용기 - 김지하의 ‘벽’ [이미지 편집 = 김보관

  <해설>
  
  김지하는 29세였던 1970년, 종합지 『사상계』 5월호와 신민당 기관지인 『민주전선』에 특권층의 권력형 부정을 비판한 장시 「오적(五賊)」을 발표함으로써 70년대의 대부분을 지명수배자가 아니면 영어의 몸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 작품에서 김지하는 재벌ㆍ국회의원ㆍ고급공무원ㆍ장성ㆍ장차관 등 다섯 부류가 일본에 나라를 팔아넘긴 을사오적신보다 죄질이 나쁘다고 분노했으니 박정희가 살아생전에 시인을 눈엣가시로 여겼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인은 벽 속에 갇혀서 벽에다 손톱으로 글씨를 쓰며 자유를 꿈꾸었다. 일거수일투족이 통제되는 참담함을 견디면서, 눈부신 빛무리 속의 아침바다를 생각했다. 이 시는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끝나는 「타는 목마름」의 속편격인 또 하나의 절창이다. 나는 이 두 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영혼의 떨림을 느낀다. 목마른 자에게 흘려 넣어줄 물 한 방울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된다. 민주주의는 그 시절 우리 모두가 목마르게 찾던 생명의 물줄기였다. 벽에다 손톱으로 시를 썼던 시인은 6년을 독방에서 지냈고 경철서 유치장과 구치소 생활, 쫓겨 다니며 숨어 산 기간을 합치면 10년 이상 옥살이를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이 아무리 위대한 치적이었다 할지라도 한 시인을 10년 동안 감옥에 가둬둘 만큼 민주탄압이 심했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1964년 한일회담 성사 과정에서 재벌ㆍ국회의원ㆍ고급공무원ㆍ장성ㆍ장차관 등 다섯 부류가 일본에 나라를 팔아넘긴 을사오적신보다 나쁘다고 외쳤던 시인의 용기가 이 아침에 내 뇌리를 강타한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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