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 내 성폭력 피해자 연대 아가미, “그루밍 성폭력 사각지대에 있는 사설 수업 피해자들” 조명해
문단 내 성폭력 피해자 연대 아가미, “그루밍 성폭력 사각지대에 있는 사설 수업 피해자들” 조명해
  • 김보관 기자
  • 승인 2019.11.15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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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붙일 수 없는 자들을 위한 차담회, 제도권 안팎의 피해에 대해
문단 내 성폭력 피해자 연대 모임 ‘아가미’의 우리, 지지, 뾰 (좌측부터 순서대로) [사진 = 김보관 기자]
문단 내 성폭력 피해자 연대 모임 ‘아가미’의 우리, 지지, 뾰 (좌측부터 순서대로) [사진 = 김보관 기자]

[뉴스페이퍼 = 김보관 기자]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한창이었을 무렵 피해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피해를 들어줄 단 한 사람이었다. 성폭력 피해 사실은 주로 온라인 공간, 그중에서도 트위터에서 활발히 폭로되어왔으며 여기에는 분명한 한계 또한 존재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문단 내 성폭력 피해자 연대 모임을 꾸리고 오프라인 활동을 이어나가는 ‘아가미’의 세 번째 좌담회가 열렸다. 지난 10월 17일 ‘차담회’라는 컨셉으로 모인 연대자들은 “우리 중 가장 많지만, 가장 드러나지 않았던 존재”였던 사설 수업 피해자들과 그들에게 가해진 그루밍 성폭력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첫 번째 발제를 맡은 ‘아가미’ 공동대표 지지 [사진 = 김보관 기자]
첫 번째 발제를 맡은 ‘아가미’ 공동대표 지지 [사진 = 김보관 기자]

성폭력 피해자 연대 모임 ‘아가미’의 세 번째 좌담회 첫 발제를 맡은 공동대표 지지(XIXI)는 “Unnamable :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들에게”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시작했다. 그는 문학수업의 구성 과정에 대한 설명부터 차근차근 이야기를 이어갔다.

문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선택지가 있다. 예고, 예대, 문예창작학과,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가는 것이 비교적 보편적이고 공식적인 방법이다. 그 외에 성인인데 대학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 혹은 대학에 들어가고 싶은 학생 등의 경우 사설 수업을 선택하게 된다.

사설 수업은 출판사나 유명 아카데미에서 문인을 초빙하는 형태로 이뤄지기도 하나 작가 본인이 개인의 이름을 걸고 개설하는 때도 잦다. 이때, ‘문단’으로 일컬어지는 강력한 위계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소위 ‘문단’이라 불리는 문학계 내부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등단’이라는 승인 제도가 필요하다. ‘등단’을 거친 이후에도 문학상 수상 여부, 창작 지원 대상자 선정의 여부 등 거듭되는 승인과 증명의 과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발표자 지지의 주장이다.

이날 차담회를 위해 마련된 다과 [사진 = 김보관 기자]
이날 차담회를 위해 마련된 다과 [사진 = 김보관 기자]

이렇게 만들어진 차등 위계 속에서 ‘승인받은 자’는 통제권, 교육권, 발언권과 더불어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지면’을 갖게 된다. 개인 수업을 열 때도 본인의 강의가 얼마나 뛰어난 지를 증명하는 몇 가지 이력이 필요하다. 주요 신문 또는 문예지에서 데뷔했거나 대형 출판사에서 다수의 책을 출간했거나 유명한 문학상을 받았을 때 ‘개인 창작 교실’ 교수자로 살아남을 수 있다.

지지의 발표에 따르면, 사설 수업에서 가르침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역시 수직적 관계가 형성되기 쉽다. 폐쇄적인 문단 구조 내에서 술자리로 이어지는 수업의 연장과 동시에 선생님은 선배로, 친근하면서도 권위 있는 모습으로 접근한다는 게 ‘아가미’ 공동대표 지지의 설명이다.

공공 교육의 영역이 아닌 사설 수업 피해자는 피해 사실을 말할 공간이나 대변할 창구가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유사한 성폭력을 당한 이들과 연대 체계를 꾸리기도 어렵다. 그렇기에 ‘아가미’의 첫 발제자 지지는 “사설 수업 피해자에게도 담론이 필요하다.”라며 “그들이 특히 그루밍 성폭력에 취약한 이유가 논의되어야 한다.”고 했다.

아가미 측의 발표 화면 [사진 = 김보관 기자]
아가미 측의 발표 화면 [사진 = 김보관 기자]

지지는 2016년 10월 말에서 11월 초 문단 내 성폭력 공론화되던 당시를 떠올리며 “나는 11월 중순쯤, 늦게서야 피해를 인지했다. 그러나 말할 곳을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이어 그루밍 성폭력에 관해 입을 열었다. 

그루밍 성범죄는 주로 아는 사람 내지는 친근한 사람이 가해자로 피해자와 가까운 관계를 형성해 심리적으로 지배 및 세뇌한 뒤 성폭력을 가하게 된다. 대부분 가해 상황에서 흉기를 휘두르거나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강간으로 인식하지 못하며 성폭력 피해 사실을 사회적, 법적으로 인정받기 또한 어렵다. 심리적 지배 과정에서 ‘가스라이팅’이 이루어져 피해자의 심리나 상황은 교묘히 조작되고 피해 당사자가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그루밍 성폭력의 특수성을 언급하던 지지는 “더불어 피해자가 폭력 사실을 인지한 이후에도 일일이 모든 사안을 판단하기가 어렵다. 이미 심리적으로 지배된 상태에서 여성성에 대한 왜곡된 가치관, 위계 문제 등 여러 사안이 얽혀있다.”라며 “문학계가 인정 제도와 인맥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더더욱 복잡해진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두 번째 발제를 맡은 ‘아가미’ 공동대표 뾰 [사진 = 김보관 기자]
두 번째 발제를 맡은 ‘아가미’ 공동대표 뾰 [사진 = 김보관 기자]

이어진 두 번째 순서로는 “사설 수업 피해자의 물리적 공간성 부재”를 주제로 ‘아가미’ 공동대표 뾰가 발표를 진행했다. 그는 ‘공간이 함의하고 있는 사회적 맥락’에 초점을 맞추며 “공간은 사회적 인정의 과정과 의미를 함축한다.”라고 말했다.

발제자 뾰는 “공간이 없다는 것은 서로의 관계가 사회적 공동체로 정의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라며 “공식적으로 인준된 공간이 아닌 데다가 특정 기간을 두고 비정기적으로 만나는 사설 수업은 성폭력 고발에 특히 어려움을 겪는다. 가해자를 공유할 커뮤니티 또한 부재한다.”고 설명했다.

학교 수업 피해자의 경우 학생회, 총여학생회, 성폭력 기구 등이 존재한다. 강사는 강사법에 따라 1년 이상 재직하며 교수의 재직 기간은 더 길다. 이 같은 점을 지적한 뾰는 “피해자 커뮤니티가 있다고 해서 모두 유리한 판결을 받지는 않지만, 피해를 인지하는 과정이 단축된다.”며 “사설 수업은 한 달에서 세 달가량의 짧은 기간 동안 이루어진다. 피해자들은 피해를 인지하기도 도움 청하기도 어려운 사각지대에 있다. 피해를 인지한 순간 그 공간과 구성원이 사라지기도 한다.”고 전했다. 역고소로 인한 명예훼손이나 가해자들의 남성 연대를 비롯한 문제와 더불어 사설 수업의 특성상 대처가 어려운 피해자들의 상황도 언급됐다.

‘아가미’ 공동대표 뾰는 끝으로 “피해자들의 연대로 하나의 공동체를 꾸려 일종의 대안 권력을 만들겠다는 포부로 아가미를 만들었다. 어떻게 하면 ‘공간’이라는 틈을 메울 수 있을지 고민했다.”라며 사설 수업 또한 문단 내 성폭력 이슈의 연장으로 보는 시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는 “성폭력 기구 안에 사설 수업의 내용을 포괄한다거나 소비자 보호법 내의 조항을 만들자는 등의 이야기를 통해 함께 해결법을 찾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차담회를 위해 준비된 다과 [사진 = 김보관 기자]
차담회를 위해 준비된 다과 [사진 = 김보관 기자]

발제 이후 이어진 2부에서는 실제 사설 수업 피해자들이 앞으로 나와 피해 경험을 읊으며 연대와 극복의 의지를 다졌다. 현장에 모인 피해자들은 2차 가해 및 보복성 고소의 위험을 이유로 촬영 및 상세 내용 기재 거부 의사를 조심스레 밝혀왔다. 중요한 부분은 기성 제도의 밖에서 개별적으로 존재하던 사설 수업 피해자들이 모이고 대화를 나눌 ‘공간’과 ‘커뮤니티’가 생겼다는 점이다.

준비된 차와 다과를 나누며 진행된 3부에서는 ‘아가미’의 구성원 우리가 “2016년에 수면 위로 오른 문단 내 성폭력은 하나의 해석 싸움이었다.”라며 “그간 가시화되거나 인정되지 않은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아직도 충분히 논의되지 못한 문단 커뮤니티 밖 피해자들에 관해 공론화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아가미’ 공동대표 지지는 앞선 발표와 담화를 정리하며 “1부는 사설 수업의 피해가 왜 사각지대에 놓여있는지 분석하고, 2부는 사설 수업 피해자가 놓인 어려움과 고충을 생생히 들어보는 시간이었다.”며 단순명료한 솔루션을 찾기보다는 구체적 담론과 질문 제시의 장으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했다.

당일 현장에서 발표된 원고 중 일부 [사진 = 김보관]
당일 현장에서 발표된 원고 중 일부 [사진 = 김보관]

이날 차담회에는 ‘아가미’ 인원 외에도 실제 피해자를 비롯해 연대와 응원의 손길을 더할 각계각층의 문학청년들이 함께했다. 소박한 인원이나마 성폭력 피해에서 ‘공간성’과 ‘커뮤니티’가 갖는 중요성에 관해 심도 있는 토론을 주고받았다.

단순히 문단 안과 밖의 구분에서 나아가 제도권 안팎을 아우른 성폭력 피해들을 다양하게 조명하고 서로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시도 역시 강조됐다. 문학계 내부에서는 성폭력 피해자 연대 모임 ‘아가미’의 좌담회와 같은 여러 공론화 과정을 통해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많은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진단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