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15) / 신촌과 들국화 - 기명숙의 ‘1987년 신촌’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15) / 신촌과 들국화 - 기명숙의 ‘1987년 신촌’
  •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11.15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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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15) / 신촌과 들국화 - 기명숙의 ‘1987년 신촌’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15) / 신촌과 들국화 - 기명숙의 ‘1987년 신촌’

 

  1987년 신촌

  기명숙

  들국화와 애인을 동시에 사랑했지
  비밀한 양다리 전략은 서울 변방을 기웃거릴 내 귀중한 양식

  아현동 굴레방다리, 사랑을 씹다 버린 콘돔이 널브러져 있고
  사람들 울컥울컥 토해내는 아현역 노란 멍울 프리지아 꽃집

  새벽녘 매연가스는 헛배앓이에 특효약이었다 궁핍은 이주민과 샴쌍둥이

  내 손아귀는 애인을 잃고 애인에게 도망치고 신촌 가파른 뒷골목, 
  그 붉은 립스틱 언니들 홍등 속으로 애인을 빼앗아 갔네

  마포 공덕 쪽이든 신촌 방향이든 가야 하는데 토껴야 하는데
  설익은 내 청춘은 최루(催淚)를 흘릴 뿐
  애인은 입술 포갠 뒤 화염병 같은 케이크에 초를 꽂았지

  행― 진―
  행― 진―
  갈기를 늘어뜨리고 들국화는 절정을 향해 포효하는데 나는

  뒷걸음치고 뒤통수는 주먹만큼 작아지고 신촌 로터리 옆구리에선
  누런 들국화가 펑펑 지고 있었다

  —『몸 밖의 안부를 묻다』 (모악, 2019)

2019년 9월 29일 홍콩 시위 현장 [에디토리얼 크레딧 = PaulWong / Shutterstock.com]

  <해설>

  한때 ‘응답하라 1994’, ‘응답하라 1997’, ‘응답하라 1988’이 인기리에 방영되는 동안 그 TV 드라마는 신촌에서 하숙을 하며 청춘을 보냈던 이들의 향수를 무진장 자극하였다. 응답하라 어쩌고저쩌고 하는 말도 유행어가 되었다. 드라마는 하숙집의 왈가닥 딸과 연대생 5명의 미묘한 사랑전선을 배경으로 했는데 1988년 무렵은 민주화를 위한 진통의 시대이기도 했다. 사회적 변동의 양상은 거의 담지 않고 러브스토리로만 끌고 가 다소 실망도 안겨주었던 드라마였다.

  기명숙 시인은 1987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아 신촌 일대에서의 추억을 더듬고 있다. 아현동 굴레방다리와 신촌의 가파른 골목, 그리고 공덕동 로터리, 신촌 로터리…… 그곳에 최루탄과 화염병이 있었다. “마포 공덕 쪽이든 신촌 방향이든 가야 하는데 토껴야 하는데/ 설익은 내 청춘은 최루(催淚)를 흘릴 뿐”이라는 시구가 실감이 난다. 1987년 노태우 대통령의 6ㆍ29선언을 이끌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얼마나 많은 노래를 불렀던가.

  이 시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은 ‘전인권이 이끄는 헤비메탈 그룹’ 들국화와 그의 대표곡 <행진>이다. 행진― 행진― 하는 거야. 애인과의 사랑전선 확인도 중요하고 시대에 대한 소명의식도 중요했던 그 시절, 이 시의 화자는 “뒷걸음치고 뒤통수는 주먹만큼 작아지고” 즉, 갈피를 못 잡고 헤매고 있다. 다 그랬었다, 그때는. “마포 공덕 쪽이든 신촌 방향이든 가야 하는데 토껴야 하는데/ 최루탄은 펑펑 터지고” 아아, 앞이 보이나 앞날이 보이나. 

  (1985년과 그 다음해, 대학원 석사과정 시절이었다. 학점 교류가 되어 연세대 국문과 이선영 교수의 강의를 두 학기 들었다. 흑석동에서 맡은 최루탄만큼이나 지독한 신촌의 최루탄 냄새. 왜 내가 다른 학교에 와서 이렇게 울어야 하나. 누런 들국화의 길을 뚫고 행진― 행진―)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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