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18) / 세월이 무섭지만 - 오민석의 ‘푸른 연기의 세월’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18) / 세월이 무섭지만 - 오민석의 ‘푸른 연기의 세월’
  •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11.1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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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18) / 세월이 무섭지만 - 오민석의 ‘푸른 연기의 세월’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18) / 세월이 무섭지만 - 오민석의 ‘푸른 연기의 세월’

 

  푸른 연기의 세월

  오민석

  *
  잠 안 오는 밤 
  페이스북 들어가니 나처럼
  잠 못 이루는 중생들 여럿 있다
  내 서재에는 온통 죽은 시인들
  네루다, 김종삼, 말라르메, 김관식, 베를렌
  엘뤼아르, 로르까, 신동엽, 백석, 발레리, 김남주,
  들과 떠들썩하게 한잔하는 밤
  1885년 11월 16일 월요일
  아폴리네르는 왜 그의 시에서
  구두점을 모두 버렸을까
  마리 로랑생 때문일까
  그러나 그의 사랑은 미라보 다리를 건너
  마들렌에게로 이사 갔다

  **
  석탄불 꺼질 무렵의
  유목민 헤밍웨이의 지친 얼굴
  킬리만자로의 흰 바람

  ***
  절대 노인이 되지 않겠다던 자신의 약속을 지킨 제레미아 드 생타무르
  그는 예순이 되자 스스로 생을 마감했잖아, 견딜 수 없었던 거야
  그러면 끝이라고 생각한 거지, 그런데 만일 그게 끝이 아니라면?
  말하자면 그는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
  사는 게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몰랐던 거지
  이제 곧 춥고 따뜻한 겨울이 올 것이다

  푸른 연기의 세월이
  또 지나간다
  나 이렇게
  잠 못 이루니
  시간의 기차여
  천천히 가자

  —『굿모닝, 에브리원』 (천년의시작, 2019)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18) / 세월이 무섭지만 - 오민석의 ‘푸른 연기의 세월’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18) / 세월이 무섭지만 - 오민석의 ‘푸른 연기의 세월’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해설>

  불로초를 찾았다는 진나라의 시황제도 나이 쉰에 죽었다. 인간은 고고의 울음을 터뜨린 그 순간부터 죽는 순간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그런데 사후에도 그의 이름이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더욱더 빛을 발하는 경우가 있다. 네루다, 김종삼, 말라르메…. 시를 썼기 때문이다. 위대한 시를. 불멸의 시를. 

  그런데 시인들의 사랑은 좀 유별나다. 아폴리네르는 바람둥이 기질이 좀 있었던 모양이다. 화가 마리 로랑생과 사랑과 이별의 과정이 없었다면 「미라보 다리」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루이즈 드 콜리니 샤티옹 부인과도 사랑도, 마들렌 파제스와의 사랑도 오래 가지 못한다. 시인의 생애도 38세를 일기로 끝난다. 하지만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미라보 다리」「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병든 가을」「별의 슬픔」 등을 써 천상에서 불멸하는 시인이 되었다. 
소설가 헤밍웨이도 활화산 같은 여성 편력이 있었지만 오민석 시인은 헤밍웨이의 궁핍했던 시절을 “석탄불 꺼질 무렵”이라는 말로 줄인다. 파리에 머물었던 무명 시절, 너무나 배가 고파 공원의 비둘기를 몰래 잡아먹은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다. 

  제레미아 드 생타무르는 실존인물이 아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 나오는 인물이다. 노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싫다고 하더니 나이 예순이 되자 자살한 이가 바로 제레미아 드 생타무르다. 오 시인은 소설의 한 인물을 내세워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냐면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는 것이 인생”이라는 명제다. 늙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같은 소설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한 살려고 애써야 한다. “사는 게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모르면 안 된다. 그래서 푸른 연기의 세월에 예술가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랑을 하는 것이려니.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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