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19) / 유쾌한 살해 충동 - 김광희의 ‘땅끝마을’
땅끝마을
김광희
미워하는 사람과 땅끝마을 가지 마
당신이 땅 끝 벼랑에 서는 순간
그가 밀어버리면
세상 밖으로 날아가 버릴 거야
고요하던 우주 한 공간이 소용돌이치고
그 속에서 허우적허우적 공전하고 자전하면서
마음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
돌아오는 길 잃어버릴 거야
그 순간 지구마을에선
잠시 수런거리며 당신의 부재 궁금해 하다가
세월 지나봐
모두 까마득히 잊고 말 거야
사람들은 원래 사라져버린 것은 뇌리에서
지워버려야 한다는 관습을 가지고 있거든
그래서 나는
당신 위해서 이 세상 끝까지 가주겠다고
얼음장부에 올릴 약속
차가운 혓바닥으로 밀원(蜜源)의 달콤 속삭이며
땅, 끝, 마을 가겠어
가장 먼 세상으로 날려 보내기엔
가장 가파른 벼랑이 좋겠지
당신은 지금 내 어깨에 기대어
지구마을 고양이털의 봄 햇살 이야기한다
키킥, 당신
미워하는 사람과 땅끝마을 가,
지 마
—시in동인회 『시in』 제2호 (2017, 세종문화사)

<해설>
전남 해남의 땅끝마을에 가면 아찔하다. 사진 찍는다고 발을 잘못 내디디면 미국 그랜드 캐년에서의 사고처럼 벼랑 밑으로 떨어져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된다. 김광희 시인은 땅끝마을에 가서 재미있는 상상을 해보았다. 마음속으로 평소에 미워하고 있던 누군가를 그곳에서 떠밀어 버린다면? 그런데 시인은 추리소설의 한 장면을 그리지 않고 사랑과 미움이 종이 한 장 차이임을 말해준다. 어느 때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이 세상 끝까지 가주겠다고 하지만, “차가운 혓바닥으로 밀원(蜜源)의 달콤”함을 속삭이며 구애하지만, 사랑이 식으면 원수가 되는 것도 한 순간이다. 신혼여행지에서 돌아와 이별하는 부부도 있다고 하지 않는가. “당신은 지금 내 어깨에 기대어/ 지구마을 고양이털의 봄 햇살”을 이야기하지만 언제 변할지 모르는 것이 연인 사이이고 부부지간이다.
하지만 이 시의 재미는 이런 사랑과 이별의 쌍곡선을 그리는 데 있지 않고 첫 연과 끝 연의 희한한 글자 배치에 있다. 너를 미워하는 사람과 땅끝마을에 가지 말라는 말을 명심해야 할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아이고 무시라.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