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20) / 랭보여 너는 왜 - 강민숙의 ‘에티오피아에서’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20) / 랭보여 너는 왜 - 강민숙의 ‘에티오피아에서’
  •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11.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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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20) / 랭보여 너는 왜 - 강민숙의 ‘에티오피아에서’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20) / 랭보여 너는 왜 - 강민숙의 ‘에티오피아에서’

 

  에티오피아에서
  —랭보의 가방

  강민숙


  파리는 지옥이었다
  지옥의 계절을 벗어나 
  떠도는 무지개 한 자락 가방에 넣고
  바람의 구두를 신고 떠나는 거야
  파리를 떠나며 가방을 열어 보니
  무지개는 햇빛이 사치스럽다는 듯
  알몸으로 웅크리고 있다
  검푸른 알몸 드러내 놓고
  눈물 흘리고 있다
  눈물이 사랑의 상징이 아니듯
  상징으로 다가서는 사랑 또한 얼마나 허망한가
  파도처럼 일어났다 뒤돌아가는 상징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감정에 매달릴 것이다
  늙은 병사가 석양에 떨어지는 
  인도양을 바라보고 있다
  아,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어릴 적 청보리밭 뛰어놀던
  푸른 얼굴들은
  이미 검은 태양에 그을려 알아볼 수조차 없으니
  이젠 유랑을 떠나는 거다
  대서양 건너 아프리카 대초원 위에
  토굴 짓고 무지개를 띄워 보는 거야
  거대한 죽음을 위하여
  일찍부터 붓을 꺾지 않았던가
  나만의 무지개를 띄워 놓고
  암사자 한 마리 옆구리에 끼고 달려 보는 거야
  함께 뒹굴다가
  이글거리는 태양의 눈동자 속으로 뛰어드는 거야

  —『둥지는 없다』 (실천문학사, 2019)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20) / 랭보여 너는 왜 - 강민숙의 ‘에티오피아에서’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20) / 랭보여 너는 왜 - 강민숙의 ‘에티오피아에서’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해설>
  
  랭보의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나 『일뤼미나시옹』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시가 랭보의 시 중 유명한 시구들을 패러디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퍼즐 맞추기처럼 맞춰보는 재미가 있는데 강민숙 시인이 노린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상징’을 시도한 무리, 즉 프랑스 상징파 시인의 공로를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어떤 사물을 끌어와 심리상태 혹은 내면의식을 드러내는 기법은 보들레르,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 발레리 등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김억의 번역시를 통해 프랑스 상징파 시인의 시를 접하였다. 이 시의 마지막 4행이야말로 ‘상징’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랭보는 열여섯 살 때부터 천의무봉의 시를 썼다. 스무 살이 되고부터는 시작을 중단하고 모험의 길을 떠났다. 파리에서의 난삽한 생활에 넌더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열 살 연상 베를렌과의 사랑의 도피행각도 총격사건으로 끝났고.

  취한 배에 몸을 실어 머나먼 서인도제도로
  침묵하는 호수와 우울한 숲이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사막의 선인장이 비를 기다리는 이집트로
  공사판의 십장이 되어 키프로스 섬으로
  무기 밀매상이 되어 예멘의 항구도시 아덴으로
  우와, 백인이 단 한 명도 발 들여놓지 않은 
  에티오피아의 오지 오가덴 지방으로!
  

  위에 인용한 것은 졸시 「천국의 랭보」에서 가져온 것이다. 랭보는 20대에 들어서는 시를 한 편도 쓰지 않았다. 노동자, 용병, 공사판 십장 등을 하며 유럽과 아프리카와 중동을 떠돌았다. 마지막에는 아프리카에서 무기 밀매를 하다가 병이 나 프랑스로 돌아와 다리 절단 수술을 받고 곧 사망했으니 37세였다. 강민숙 시인은 랭보의 자유혼이 부러워 “어릴 적 청보리밭 뛰어놀던/ 푸른 얼굴들은/ 이미 검은 태양에 그을려 알아볼 수조차 없으니/ 이젠 유랑을 떠나는 거다”라고 부르짖고 있다. 이런 인생, 얼마나 부러운가. 나 또한 의무감, 체면치레, 호구지책 따위 다 떨쳐버리고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세상에 가서 숨어살다가 증발하고 싶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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