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29) / 슬픈 추억담 - 이영춘의 ‘담임선생님’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29) / 슬픈 추억담 - 이영춘의 ‘담임선생님’
  •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11.2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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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29) / 슬픈 추억담 - 이영춘의 ‘담임선생님’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29) / 슬픈 추억담 - 이영춘의 ‘담임선생님’

 

  담임선생님 

  이영춘

  밥상은 너무 가벼웠다
  냉수 한 사발에 옥수수 몇 통, 그리고
  숨죽이고 누워 있는 열무김치 한 접시, 

  툇마루엔 산 그림자를 안고 넘어가는 햇살이 
  밥상을 기웃거리고

  할머니는 굽은 등 굽히시며 무슨 잘못이라도 한 듯 연신 손등을 비비신다

  아이는 너무 창피하여 미닫이 쪽문 뒤에 숨어서 그 광경 훔쳐보는데
  선생님은 옥수수 한 입 뜯어 물고 
  옥수수 알갱이처럼 우물우물 말씀하신다

  실은 교납금 때문에 왔습니다. 영춘이가 아직 교납금이 미납되었습니다.

  쪽문 뒤에서 숨어 듣던 그 아이,
  아이는 열한 살이었다

  열한 살 그 아이의 체증, 뱃속 깊숙이 숨어서 꼬르륵꼬르륵 
  깊은 허기로 신호를 보내온다

  그 얼굴 아직도 태양초처럼 붉어지고 있다고
  그 체증 아직도 쿵쿵 복통을 일으킬 때가 많다고

  ―『따뜻한 편지』 (서정시학, 2019)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29) / 슬픈 추억담 - 이영춘의 ‘담임선생님’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해설>

  강원도 봉평 태생인 이영춘 시인이 열한 살 때 겪은 실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한 이유가 있었다. 영춘이가 아직 교납금을 내지 않아서 독촉을 하려고 찾아온 것이었는데 “할머니는 굽은 등 굽히시며 무슨 잘못이라도 한 듯 연신 손등을 비비신다”. 선생님께 대접을 한답시고 내놓은 것은 옥수수와 열무김치가 전부였다. 집에 먹을 것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어서 이렇게 내놓은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쪽문 뒤에 숨어서 듣고 있던 어린 영춘에게 그날의 일은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마지막 연은 아마도 이런 뜻이 아닐까. 배가 고파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나면 곧바로 얼굴이 태양초처럼 붉어지고 체증은 복통을 일으키기도 하는 모양이다. 아아, 그날 얼마나 수치심을 느꼈으면! 

  이런 식의 가난은 그 시절엔 사실 항다반사였는데 이 시 속의 집은 좀 특이하다. 담임선생님을 맞이한 이가 아버지도 어머니도, 언니도 오빠도 아닌 할머니였기 때문이다. 이 집의 특수한 상황을 이 시만으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다들 생활전선에 나가 있는지 집에는 할머니와 영춘이밖에 없다. 불쌍한 영춘이는 나가서 담임선생님께 인사도 못하고 쪽문 뒤에 숨어 숨을 죽이고 있다. 

  강원도의 정서를 가장 잘 그릴 줄 아는 여성시인으로 이영춘을 꼽고 싶은데, 제 14시집에도 이처럼 애잔한 추억을 들추는 시가 있어서 가슴이 아프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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