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석자
사회 : 김지윤(시인, 문학평론가)
참석자 : 문종필(문학평론가), 김사이(시인), 신지영(소설가), 하명희(소설가)



김지윤: 최근 한국문학이 동시대 타자들을 향하고 있고,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의 정치성’ 같은 논의가 전에 없이 뜨거워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새로운 시대감각과 젠더의식에 바탕을 두고 문학적 재현의 방식도 변화하고 있는 점이 있구요. 이 기점을 ‘세월호 참사’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삼아 소위 ‘세월호 이후의 문학’이라고 호칭하기도 하는데요. 2010년대의 사회적 문제들과 ‘세월호’로 대표되는 고통스러운 현실이 우리에게 준 절망감, 그리고 그것이 문학에 미친 영향들은 확실히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소위 ‘세월호 이후의 문학’이 어떻게 변모했고 어디로 나아간다고 보십니까?
하명희: 세월호 참사 이후에 문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던져졌고, 삶과 죽음, 사회와 개인, 한국사회에 대한 지옥도가 드러났지요. 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꾸준히 세월호 문학이 나올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2014년에 전태일문학상을 받은 작품이 1991년 5월 투쟁에 참여했던 고등학생들이 나오는 장편소설이거든요. 그때로부터 20년이 지났는데도 저는 그걸 써야 다음 작품으로 넘어갈 수 있겠더라고요.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세월호 이후의 문학은 그때 당시 사회의 모순, 어른들의 행태, 사회의 불합리와 조롱, 그럼에도 친구가 사라진 학교를 가야만 했던 그 세월호 세대에서 나올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얼마나 오래 걸리든지 말이죠. 사실 ‘세월호 이후의 문학’이라는 레테르 자체도 비평을 위해 만든 용어 같은 느낌이 있네요.
신지영: 참사 이후로 한 달 동안 아무 것도 못했던 기억이 있어요. 운다는 것도 죄스러워서 울지 못했어요. 한참이 지난 후에 무언가 막힌 것이 빠져나가듯 펑펑 울었는데 그때도 과연 내가 울 자격이 있는 것인가, 울 자격이라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했었어요. 지금은 그래도 시간이 지나서 울 수 있지만, 여전히 저한테는 차분히 사건을 회고하고 진단하고 쓰기를 선택하는 과정 자체가 아직은 불가능한 것 같아요. 글을 쓸 자신은 없고, 대신 304낭독회에서 아이들을 생각하며 노래를 부른 적은 있어요. 글로 쓰는 것은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고,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할 수도 있겠죠.

김사이: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사회적 타살이나 참사는 수없이 있었지요. 세월호 참사 전에도 그 이후로도 일터에서 청년노동자나 건설노동자들이 다치거나 죽는 비슷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특별하게 그 시점을 계기로 전후 구분하여 한국문학이 어떻게 가고 있는지를 고민해보지는 않았어요. 어느 시기, 어느 세대에 의해 세월호에 관한 작품은 예술분야에서 다양하게 생산되지 않을까 싶네요.
문종필: 저는 세월호를 생각할 때마다 스스로의 감정 상태를 반복해서 쳐다볼 수밖에 없어요. 세월호 당시 분노했던 저의 감정 상태가 지금은 일정 부분 변했기 때문인데,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용서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지옥 같은 지금 이곳의 현실 때문인지도 몰라도 세월호 당시의 감정을 동일하게 반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택한 방법은 ‘나’의 부조리함과 연관된 모순 앞에 당당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짜 논문 심사를 통해 투고율을 높여 등재지를 유지하려는 어느 학회지의 심사 청탁을 거절하거나, 작가에 대한 글을 쓸 때 주례사 비평을 하지 않는 것 정도가 그것입니다. 부끄럽지만 세월호의 기억으로부터 제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현재 이 정도뿐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방금 선생님들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만 ‘진정한’ 세월호 이후의 문학은 세월호 세대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지윤: ‘세월호 이후의 문학’이란 현재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고, 진짜 세월호 세대가 목소리를 내게 될 새로운 문학을 기다려야 하는 문제라는 점에 의견이 모아지는 것 같습니다. 저도 물론 동의합니다. 몇 년 전에 백은선 시집 『가능세계』 (문학과지성사, 2016)에 대해서 한 계간지의 리뷰 대담에서 거론되었던 말들이 생각나네요. 그 대담에서 이 시집 속에 드러나는 서사성이나 스토리구조의 붕괴나 파편적 이미지들이 “세계에 대한 절망적 인식과 관련이 있다”(김소연의 말, 김소연. 김영찬. 백지연 대담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창작과 비평』, 2016년 여름호, 442쪽.)고 보았는데, 이미지나 서사의 응집이 불가능해지는 세상의 파탄과 절망의 극한에서 지르는 어떤 ‘절규’와 같은 부분이 있었거든요. 쉽게 상처를 봉합하고 희망을 말하지 말라는 것처럼요. 그때 “세월호 이후 처음 등장한 세대의 첫 발화를 목격”하는 것 같다는 평가가 있었는데 그게 참 인상적이었어요. 물론 아직 그 세대가 성장해서 문단에 등장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진짜 ‘세월호 이후의 문학’은 세월호 세대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저 역시도 기다려지는 점이 있습니다. 하명희 선생님 말씀처럼 ‘세월호 이후 문학’이라는 말도 비평을 위해 만든 언어 같다는 지적에 겸허해지는 마음으로, 그냥 이렇게 여쭤볼게요. 최근 몇 년 간의 일련의 중요한 사건들과 사회적 인식 변화 등을 겪으면서 현재 시점에서 현실을 반영하는 문학장의 흐름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신지영: 현실을 반영하는 문학장의 어떤 경향성은, 제가 여기서 진단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일단 그냥 제 경우를 이야기해 보자면요, 제가 스무 살 때였어요. 그때 한창 노동자들의 시위가 있었는데 그분들이 분명히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심정적으로 지지를 보냈어요. 그런데 마음 한 구석엔 또 이런 생각들도 들었어요. ‘그래도 저 분들은 좋겠다. 함께 외쳐줄 사람들이 있으니까’라는 생각이었어요. 제가 보기에 분명히 고통스러운데 아무도 그 곁에 있어주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지금 표현으로 하면 보이지 않는 노동을 하는 분들이라고 할까요? 그분들이 어떤 분들이냐면, 제가 사는 동네가 금천구인데 5413번이라고 금천지역에서 강남지역으로 가는 버스가 있어요. 보통 첫 차는 새벽에 출발하니까 사람이 잘 안타잖아요. 그런데 이 버스는 4시 20분에 출발하는데 사람이 꽉 차요. 주로 나이든 분이 많으신데 대부분 강남지역으로 일하러 가시는 분들이에요. 일용직, 가사도우미 등이 그렇죠. 그렇게 사람들을 가득 실은 차가 몇 대 지나가면 버스가 보통 다른 새벽 버스처럼 텅텅 비죠. 그러다 러시아워 시간이 되면 다시 사람들로 가득 찬 버스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이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공백이 있는 것 같아요. 8~9시에 출근 하는 분들의 고통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데 그 전의 시간은 우리에겐 없는 시간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보려고 하는 게 이런 사람들 같아요. 최근에는 이분들을 주제로 노래도 만든 적이 있었고, 국가, 사회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탈북 청소년이나, 노동과 자본의 대립구도에서 주변으로 밀려나 소외되었던 노인, 시장상인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지금도 쓰고 있어요.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저는 계속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종필: 2019년에 출간된 모든 시집을 읽어 본 건 아니지만, 최근 시집 속에 등장하는 화자들은 지금 이곳의 풍경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옥은 아니지만 지옥 같은 이곳의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젊은 ‘화자’들이 자기가 몸담고 있는 공간 안에서 오염된 자신을 글로 쓸 수밖에 없고, 이러한 ‘구체적’ 통증이 계속 지속될 거라고 생각해요. 이건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이라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의식’은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2020년에 출간될 시집들이 기다려지네요.

하명희: 제가 요즘 답십리도서관에서 상주작가로 일을 하고 있는데, 그곳을 오고가다가 아주 재미있는 인물을 발견했어요. 신답역 근처 공원에서 노숙하는 노인인데요. 그 공원이 다 그 노인의 집 같은 거예요. 하루는 벤치 옆에 빗자루 걸려 있고, 또 하루는 새로운 매트리스가 놓여 있고, 어느 날은 밀짚모자가 걸려 있는가 하면 또 어느 날은 대추를 말리고 있고. 다음 날 보면 은행을 널어놓고 밤나무 털고 있고…. 리어카로 폐지와 고물을 주워 팔면서 길에 널린 감이나 대추, 은행을 말려서 먹을 만큼 먹고, 누가 지나가든 말든 그분은 길에서 새로 가져온 매트리스 위에서 자고 있어요. 만약 제가 그 인물을 소설 속에 넣게 된다면 2019년 한국의 답십리에 사는 신답 공원의 노숙자일 수도 있지만, 저는 그 노인에게서 굉장히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봤거든요. 집이 없는 빈곤 노인이 아니라 집을 버리고 자연을 택한 도시인의 삶, 그런 것들. 그러면 그 노인은 핀란드의 히스 공원에서 아무것에도 구속되지 않고 살아가는 예술가처럼 그려질 수도 있는 거죠. 노숙자의 빈곤을 말할 거냐, 구속되지 않는 새로운 도시의 삶을 말할 거냐에 따라 소설은 완전히 다른 방식을 취하게 되겠죠. 저는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을 담아낼 수 있는 예술의 자유로움과 잠재적 가능성을 사랑해요. 언제나 짝사랑이지만요. 현실의 재현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네요.
김사이: 문학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변화가 있었지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리얼리즘은 사실 작가들이 계속해서 해왔던 것인데, 새로운 방식이 필요해진 것 같아요. 그런데 예전 작가들은 이전의 ‘현실 고발’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점이 있었으니까요. 이제 골방에서 혼자 쓰는 게 아니라 세상으로 나와야 하고, 대중들에게 폭넓게 다가갈 수 있는, 젊은 세대도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반성할 필요가 있는 것 같고, 그런 움직임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김지윤: 비슷한 얘기일 수 있는데, 현실의 재현에 대해 얘기했으니 이번에는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역사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가 가능하겠지만, 과거의 기억과 연관되어 있는 한 문학과 역사는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문학은 주류 기억에 묻혀 있는 사적인 기억들을 발굴하기도 하고, 주류 기억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대안 담론으로의 기능도 하죠. 최근 새로운 방식의 역사를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이어져오고 있는데요. 역사의 문학적 재현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요.
신지영: 제가 김대현 문학평론가와 함께 <법정에서 만난 역사>라는 서양사 책을 쓴 적이 있어요. 집필을 하는 동안 인물 선정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주로 제가 인물 부분을 맡았는데 그때 눈에 들어온 사람들 또한 역사의 분기점에서 자신의 역할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역사에 기입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어요. 2차 대전 당시 어린 나이에 죽은 숄 남매라던지, 프랑스 혁명 때 여성의 인권을 주장했던 구주같은 인물들이 다가왔죠. 이런 사람들의 삶을 재현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사람들이 살았다. 하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죽음조차 조롱당했지만 그들이 거기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문학에서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최근의 감각을 제가 못 따라 갈 수도 있는데 사실 지금 나오는 이야기들이 저에게는 옛날부터 익숙해서 그냥 편해요. 제가 쓰고 있는 시장 이야기 중에 나오는 한 분의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저희 시장에 작은 백반집을 하는 분이 있는데 그 집에 나이가 멈춘 아들이 있어요. 제가 처음 보았을 때 그 아들이 청년이었는데 지금도 청년이에요. 아버지는 어느새 늙고 병들었는데 아들은 여전히 비좁은 시장에서 자전거를 타며 누구에게나 웃고 반말로 인사를 해요. 절대 시장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없어요. 그분에게 시장은 세계의 전부인거예요. 상인들은 대부분 아들을 알기 때문에 약간 장사에 방해가 되도 웃으면서 받아주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인지 아버지도 아들을 신경 쓰지 않고 백반 배달을 하는 거죠. 그냥 그 분들이 존재 자체로 자연스러운 거예요. 이때 시장은 파편화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한 사람을 위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로 느껴져요. 대형 마트였으면 이런 일은 없겠죠. 아마 그분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은폐되고 아버지도 매장을 운영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아마 저는 이런 분들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게 역사 속에서 지워진 사람들을 찾아 기입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문종필: 역사를 다시 반복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복된 역사를 통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다시 기억하게 되고 이러한 기억의 힘이 지금, 여기의 문제를 다시 붙들 수 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문학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 장르가 역사를 재현하는 것은 고무적인 일 같아요. 우리 주변에는 ‘의미’로 기억되지 못한 채 사라지는 무수히 많은 존재들이 있는데, “역사의 문학적 재현”을 통해 이 떠돌아다니는 망자들의 영혼의 아픔을 끌어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김지윤 선생님께서 “새로운 시대감각과 젠더의식에 바탕”을 두고 재현하는 방식에 대해 거론하셨는데 저도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로 인해 억눌려 표현되지 못한 무수히 많은 정서들을 끄집어 올릴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