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행 도서정가제로 인하여 소비자와 중소서점만 어려움에 처한 것이 아니다. 작가들은 더이상 책을 출판해 줄 출판사를 찾을 수 없다. 자연스럽게 고전적인 의미의 종이책 작가가 배출되는 생태계는 완전히 사라졌다. 한국에서 그 동안 출판사는 단순히 책을 ‘출판’하는 곳이 아니라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고 출판할 만한 콘텐츠를 기획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2014년 이후 출판사는 더이상 신진작가를 발굴하고 새로운 콘텐츠를 기획할 수 없게 되었다.
현행 출판문화산업진흥법은 완전 도서정가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대폭 개정되었다. 그 결과 2003년부터유지되어 오던 도서출판 생태계의 균형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기존 도서정가제 중에서 특히 작가와 출판사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친 개정내용은, 발행일로부터 18개월이 지난 구 간행물을 도서정가제 적용의 예외로 규정했었던 제22조 제4항 제1호를 삭제한 것과 재정가를 18개월이 지나야 할 수 있도록 새롭게 제2항을 신설한 규정을 지적할 수 있다. 변경된 법규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출판문화산업진흥법]
제22조 ① 생략.
②발행일로부터 18개월이 지난 간행물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정가를 변경할 수 있다. 이 경우 정가표시는 제1항의 규정을 준용한다(신설).
⑥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간행물에 대하여는 제3항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1.발행일로부터 18개월이 지난 간행물(삭제)
2.(도서관)삭제
위와 같은 개정으로 인하여 기존에는 사실상 발행일로부터 18개월 지난 구 간행물의 경우 도서정가제가 적용되지 아니하여 할인율에 제한이 없었으나, 개정 도서정가제에 의하여 제4항 제1호가 삭제되어 구 간행물에도 도서정가제가 예외없이 적용대상이 된 것이다. 또한 발행일로부터 18개월이 지난 구 간행물의 경우 재정가의 대상으로 명시되었다. 문제는 재정가 절차를 대통령령에 따라 규정하도록 하였으나, 이에 따라 규정된 대통령령에서는 ‘출판사’가 ‘직접’ 간행물의 정가를 변경하여 적용하려는 달의 전 달 15일까지 소정의 사항을 진흥원과 해당 간행물의 유통에 관련된 사업자 및 사업자단체에 알려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발행일로부터 18개월이 지난 구 간행물의 경우 도서정가제 예외였으나 현행법에서는 재정가 대상으로 규정되었다. 그 재정가 절차 또한 상당히 까다로워서 출판사들은 서점들에게 배본된 도서를 다시 회수하여 재정가해서 판매하기 보다는 폐지로 처리하는 것을 경제적으로 유리한 상황으로 받아들였다. 이로 인하여 개정 법의 취지와는 달리 재정가 판매가 사실상 과도한 제약으로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시급히 개선해야 할 사안이다. 개정 당시부터 일부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완전 도서정가제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재정가 자체를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개정 도서정가제를 사실상 완전 도서정가제로 운영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국회에서 개정 당시 해당 전문위원의 검토의견을 보면 현행 도서정가제의 문제점을 예견하고 이를 지적하고 있다. 해당 전문위원은 검토의견서에서 발행된지 18개월 지난 구 간행물에도 도서정가제를 적용하는 것은 도서정가제가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하 ‘공정거래법’이라 함)상 재판매가격유지행위 금지 의무의 예외로서 대통령령에 따라 고시되는 저작물에 예외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를 확대 적용하는 것은 공정거래법의 취지에 벗어나는 과잉 입법이며, 이로 인하여 소비자의 후생이 감소할 뿐만 아니라 출판사들과 서점들간 경쟁을 과도하게 제한하여 간행물 판매의 위축을 초래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더구나 재정가를 통하여 우려를 일부나마 완화하려고 하였으나, 살펴 본 바와 같이 재정가를 절차적으로 어렵게 규정함으로써 중소출판사들이 지금과 같은 경영난에 봉착하게 되었다.
또한 출판사들이 재정가 절차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구 간행물을 판매할 기회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자 출판사들이 신인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과감한 기획출판도 사라지게 되었다. 출판사들이 구 간행물 재고를 판매하지 못하고 폐지로 파쇄하는 비율이 발행량의 20퍼센터에 달한다는 통계가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실제 드러나지 아니한 악성재고로 인한 출판사들의 경영악화는 생태계를 밑으로부터 무너지게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서정가제를 개정하고 5년이 지난 시점에서 중소 출판사가 하나 둘 사라지고 신진 작가가 나오지 않게 된 현실은 개정안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점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일부 대형출판사들은 시장이 위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점적 지배력을 공고히 하고 있으며 온오프라인 대형 서점들과의 마케팅 유착을 통하여 상호 독점력을 강화시키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경쟁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현행 법하에서라도 재정가제도가 가진 문제점들을 기술적, 법적으로 해소 가능한 방안을 모색하여 출판사들이 가진 재고를 시장에서 소화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하여 소비자들에게는 ‘할인의 추억을’, 작가와 출판사들에게는 ‘재도전의 기회를’ 제공하는 새로운 신뢰를 형성해야 한다. 지난 9월 17일 국회토론회에서 일부 대형 종이 출판사들이 주장했던 ‘완전 도서정가제’의 망령을 떨쳐내고 ‘도서 소비자’와 ‘도서 생산자’간에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 그것만이 공멸의 위기에 처해 있는 도서생태계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다. 그런 점에서 ‘완전 도서정가제를 반대하는 생태계 준비모임(완반모)’이 후원하고 인스타페이가 실행하는 12월 4일 ‘북새통’이 제자리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 유투브에 공개된 문학동네 파쇄 사례에서 보듯이 대형 출판사라고 예외는 아니다. 출판사가 사라지고 작가가 더이상 배출되지 않는 곳에 어떤 희망이 있겠는가. 완반모와 인스타페이가 준비한 북새통이 그 희망의 싹을 키우길 기대해 본다.
(배재광 완전 도서정가제를 반대하는 생태계 준비모임 대표, law@cyberlaw.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