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34) / 유리왕의 이별 - 이경교의 ‘황조가’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34) / 유리왕의 이별 - 이경교의 ‘황조가’
  •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12.04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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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34) / 유리왕의 이별 - 이경교의 ‘황조가’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34) / 유리왕의 이별 - 이경교의 ‘황조가’

  황조가    

  이경교


  궁핍도 때론 아름다웠다고 뒤뚱뒤뚱, 도시의 비둘기 한 쌍
  사람들 발자국 사이로 탁발을 떠난다

  다리를 저는 초로의 사내와 누추한 여자가 막 지나간 자리
  아내는 국경을 넘어갔다고, 남편은 공사판에서 죽었다고
  짝 잃은 한 쌍이 남기고 간 발자국을 뒤쫓아 

  큰 수렁처럼 발자국 안에 고이는 그늘,
  그걸 모이인 줄 알고 
  부리로 쪼아대는 비둘기 한 쌍,
  지금 막 탁발을 끝낸 자리

  언젠가 네가 찍어놓고 간 아담한 발자국, 그 위로 허기진
  어둠이 쌓인다

  —『장미도 월식을 아는가』(시인동네, 2019)

 

  <해설>

  유리왕의 「황조가」는 이 땅 최초의 시요 최초의 노래였다. 기원 42년에 탄생한 「구지가」보다, 기원 2세기경 고조선 시대의 「공무도하가」보다 빠른 기원전 17년 때 만들어진 시가 「황조가」였다. 유리왕 3년, 골천골에서 궁으로 들어온 화희는 중국 한나라에서 정략결혼으로 시집 온 치희를 몹시 미워했다. 왕이 신하들과 사냥터에 나갔을 때 질투심에 불타오른 화희가 치희에게 가서 욕을 퍼붓자 치희는 몸종을 데리고 본국으로 가버렸다. 궁에 와서야 이 소식을 들은 유리왕은 국경지대로 말을 몰아 달려갔지만 이미 치희는 국경을 넘어가 버렸다. 말에서 내려 나무그늘에 앉아 쉬고 있을 때 꾀꼬리 두 마리가 희롱하며 노는 것을 보고 지었다는 시가 「황조가」다. 이 땅 최초의 시가 이별가였다. 

  이경교의 이별가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이별의 여러 경우를 읊었다. “아내는 국경을 넘어갔다고”는 무슨 경우일까? 북한에서 온 주민일까? 이혼하고 이민을 간 것일까? 가난이 가족을 함께 살게 하지 않는 경우는 너무나 많다. 그저 함께 사는 것만도 행복인데 어떤 가족은 헤어져 영영 못 만나기도 하고……. 다문화가정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빚 때문에 사이가 돈독한데도 이혼하는 부부도 있다. 이런저런 다양한 이별의 장면을 떠올려본다. 「황조가」 이후 이 땅에서는 얼마나 많은 이별가가 불리어진 것인가. 사람이 비둘기를 부러워하게 되다니.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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