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36) / 가자 대륙의 저 끝으로 - 정영효의 ‘마방’
마방
정영효
마방은 설산이 녹을 즈음
겨우내 염장한 송이를 싣고 마을을 나선다
노을이 피멍처럼 산위에 맺힐 때까지
벼랑의 허기를 뚫고 걷다,
먼지 씹은 말의 기침소리를 들으며 땀구멍을 해열한다
저녁이 시작되는 곳에 천막을 치는 마방
풀벌레가 죽음을 예지한 울음으로 어둠을 물들이면
눈 속에 묻힌 망령들이
다시는 마방이 되지 않기를 빌고
모닥불에 노래를 태운다
그때마다 그들은 내면에 갇힌 메아리를 노래에 섞어보지만
능선을 지나는 바람에나 잠시 인용될 뿐
사그라지는 불꽃을 재우는 연기의 경로와
협곡에 찍힌 구름의 지문으로 기후를 짐작해야 하는
마방에게 티베트의 고원은 신앙이다
마른 빵을 씹으며 적막과 동침하는 밤
담요 속에 웅크려 잠을 기다리듯 때로는
삶이 시간의 오지에서 홀로 체류해야 하는 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 그러므로
말이 제 발자국 냄새를 맡고 킁킁거리는 아침이 와도
서로의 눈빛을 묵인한 채
새들도 우회하는 하늘 아래
마방은 짐을 싣고 길을 떠난다
―『2009 신춘문예 당선시집』(문학세계사)

<해설>
정영효 시인은 티베트 드넓은 고원이 자기 집인 마방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한다. 낙타를 타고 교역을 위해 사막을 종주하는 이들을 카라반(caravan)이라고 하고, 말을 타고 교역을 위해 고원지대를 종주하는 이들을 마방이라고 한다. KBS 다큐멘터리 프로 <차마고도>를 통해 마방의 세계가 우리에게도 알려졌다. 차마고도의 역사는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교역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또한 차마고도는 실크로드보다 200년 앞서서 형성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교역로다. 멀고 험한 길을 무거운 차를 싣고 오갔던 마방을 시인은 부러워하고 있는 듯하다. 황사가 자욱하게 내린 골목을 걸어 귀가하면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떠올린 시인이었으니 오죽했으랴.
고원의 적막과 도시와의 격절에서 오는 고독을 형상화한 이 시의 어조는 위풍당당하다. 소재 자체가 시공을 초월한 깊이와 무게를 지니고 있는 것이어서 그렇겠지만 정영효의 시는 우리 시사에서 드물게 발견하게 되는 대륙적인 기질과 대평원의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 등단작 「저녁의 황사」도 작풍이 비슷하다. 이육사와 유치환이 보여주었던 대륙적 기질의 시를 정영효 시인이 이어갔으면 한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