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41) / 박 터져라 수박 - 배영옥의 ‘수박’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41) / 박 터져라 수박 - 배영옥의 ‘수박’
  •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12.11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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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41) / 박 터져라 수박 - 배영옥의 ‘수박’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41) / 박 터져라 수박 - 배영옥의 ‘수박’

  수박

  배영옥


  붉은 뇌수로 꽉 찬 수박을 싣고
  트럭이 왔다

  수족이 다 잘려나가는 고통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한 생애가 완성되는
  수박

  저 사내는 머리통만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이다

  엽기적인 살인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기 전에
  어서 빨리 해치워야 한다고
  붉은 뇌수가 곪아터지기 전에
  서둘러 처분해야 한다고

  몇 번의 짧은 흥정도 없이
  옛소, 수박!
  사내가 안겨주는 머리통을 받아들고
  염치도 없이 돌아와

  쓸쓸히 혼자 식탁에 둘러앉아
  쩍 갈라터진 뇌수를
  빨아먹는다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문학동네, 2019)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41) / 박 터져라 수박 - 배영옥의 ‘수박’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해설>

  배영옥 시인은 작년 6월 11일, 병마와 싸우다 지쳐 눈을 감았다. 고영 시인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50년 지상에 머문 시인은 먼 세계로 훨훨 날아갔지만 나는 유고시집을 읽는다. 시가 다 참 좋기에 더더욱 애통하다. 

 여름이면 트럭에 수박을 싣고 와서 파는 사내들이 있다. 수박은 참 신기한 과일이다. 시인은 수박이 “수족이 다 잘려나가는 고통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한 생애가 완성되는” 존재라고 했다. 인간이 수박이다. 자기 자신이 수박이다. 딱 사람 머리통 크기다. 작은 수박은 아이의 머리, 큰 것은 어른의 머리. 겉은 초록색 바탕에 검은 색 줄무늬가 있는데 안은 빨갛다. 흡사 사람 머리통의 뇌수처럼. 수박 파는 사내는 “옛소, 수박!” 한마디하고는 수박을 안겨주었다. 독신인 화자는 집에 와서 쓸쓸히 혼자 식탁에 ‘둘러앉아’ “쩍 갈라터진 뇌수를/ 빨아먹는다”. 「수박」을 쓴 시점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짐작컨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서 쓴 시가 아닐까? 암세포가 엄습한 자신의 몸. 현대의학도 포기하기에 이른 말기 암의 몸. 

  시인이 평소에 수박을 즐겨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혼자 살면서 수박을 사 들고 오는 경우는 잘 없다. 사내가 수박을 빨리 팔고 휴식처로 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사준 것이 아닐까. 착한 사람들은 왜 이렇게 서둘러 세상을 하직하는지,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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