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43) / 죽음을 예감하고는 - 조병화의 ‘늙는다는 것은’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43) / 죽음을 예감하고는 - 조병화의 ‘늙는다는 것은’
  •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12.1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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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43) / 죽음을 예감하고는 - 조병화의 ‘늙는다는 것은’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43) / 죽음을 예감하고는 - 조병화의 ‘늙는다는 것은’

  늙는다는 것은 

  조병화 


  늙는다는 것은 버리며 사는 것이려니
  늙는다는 것은 나누며 사는 것이려니
  늙는다는 것은 물러나며 사는 것이려니
  늙는다는 것은 물려주며 사는 것이려니

  아, 늙는다는 것은 포기하며 사는 것이려니
  초월하며 사는 것이려니
  비어주며 사는 것이려니

  매일이 그러하길 
  매일매일이 그러하길
  남은 날 남은 날까지 그러하길
  생각하며 다짐하며 사는 요즘
   
  아, 늙는다는 것은
  혼자 남아가길 사는 것이려니.
       
  —『넘을 수 없는 세월』(동문선, 2005)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43) / 죽음을 예감하고는 - 조병화의 ‘늙는다는 것은’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해설>

  조병화 시인(1921~2003)이 작고 얼마 전에 쓴 시로, 유고시집에 실려 있다. 80년 생애를 살면서 크게 깨달은 것이 있어서 마치 유언을 하듯이 시로 썼다. 나이를 먹을수록 입은 닫고 주머니를 열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게 잘 되지 않는다. 말은 한마디라도 더 하려고 들고 주머니는 좀체 열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지방에 다녀오고서 어느 행사장에 갔는데 뒤풀이자리에서 1만원씩 걷어 식비를 내기로 했다. 카드밖에 없어서 결례를 하게 되었고, 이제는 꼭 현금을 갖고 다니자고 결심을 했다. 

  이 시는 생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하면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현명한가를 생각하고선 스스로 다짐하는 내용이다. 늙는다는 것은 결국 혼자가 되는 것이고 그래서 “혼자 남아가길 사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다. 사실 시인은 대학사회에서나 문인단체에서나 ‘권력과 영광’(그레엄 그린의 소설 제목)을 한평생 누렸다고 할 수 있다. 학창시절에는 럭비 선수였고 성인이 되어서는 화가가 되어 시화전시회를 여러 번 했다. 해외여행도 수십 차례 했고 그의 시비가 생전에 십여 개가 세워졌다. 사후에는 수십 개가 더 세워졌다. 하지만 늙어가면서 그가 느낀 것은 허무함과 고독감이었다. 이런 심정을 나무나 잘 알았던 옛사람들은 사람의 일생을 공수래공수거라고 했고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고 했다(탄노가). 백만장자도 그 돈을 써보진 못하고 지상에 몽땅 두고 간다. 자식들끼리 재산다툼을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유고시집에 실려 있는 「비석」이란 시는 “비석이 쭈르르 비를 맞고 있다/ 순수 고독, 순수 허무”가 전문이다. 자신의 비석에 이 네 글자가 새겨지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이렇게 시로 자신의 비문까지 쓰고 그는 2003년 3월 8일에 경희의료원에서 영면하였다. 종교적 성향이 그리 강하지는 않았지만 불교에 가까웠던 그는 기독교나 천주교의 장례를 따르지 않았다. 그의 육신은 고향 안성의 편운제 안에 있는 언덕에 묻혔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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