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45) / 이야기가 있는 동시 - 송진권의 ‘기사와 공주’
기사와 공주
송진권
엄마가 방직공장 다니던 아가씨 때
공장 쉬는 날엔 하루 종일 밖에도 안 나가고
밀린 잠을 자다가 TV만 봤지
할머니가 집에만 있지 말고 친구들 좀 만나고 다니래도
엄마는 TV 보는 게 더 재밌고 좋았어
TV를 볼 때 엄마는 행복했어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공주를 꿈꾸기도 하고
왕과 나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지
그런데 그만 TV가 고장이 난 거야
할머니는 애국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TV를 보니
견디겠냐며 걱정을 하셨지
수리점에 전화를 했는데
키만 멀쑥한 기사가 찾아왔어
팔뚝에 돋은 푸른 핏줄과 짙은 속눈썹을 따라
환한 빛이 따라 들어오는 거야
퓨즈가 나갔다며 갈아 끼우는
기사의 뒷모습이 그렇게 듬직하고 믿음직했어
명함에 적인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고 만나기 시작했어
그렇게 아빠는 엄마의 기사가 된 거야
그 뒤로 쉬는 날에 엄마는
할머니 소원대로
집에 붙어 있는 날이 없었지
—『동시발전소』(2019년 가을호)에서

<해설>
아주 색다른 동시다.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 같은 소설을 방불케 한다. 이 동시의 화자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는 과정을 아는 대로 정리해서 이야기체로 썼다. 동화도 아니고 소년소설도 아니고 시도 아니고 동시로. 순전히 창작이라고 하더라도 개연성이 확실히 있다.
이 시의 기사는 기사(技士)와 기사(騎士)의 뜻 2개를 다 갖고 있다. TV를 고치러 온 기사(技士)는 어머니의 기사(騎士)가 되어 TV 앞의 아가씨를 영화관 스크린 앞으로 이끌었다. 혼자 있을 때야 TV가 볼거리지 애인이 생겼는데 뭐 하러 종일 TV 앞에 죽치고 있을 것인가. 딸이 TV 앞을 떠나는 할머니의 소원은 결국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 시의 화자가 태어나 시를 쓰게 된 것이고.
인구가 줄고 있다는데 남과 여가 자연스럽게 만나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요즘 세상에는 미팅도 소개팅도 없는 모양이다. 연애편지라는 것도 사라졌다. 남과 여가 조용히 대화를 나눌 다방도 찻집도 없다. 연애를 해야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게 될 것이 아닌가. 대구의 전통사학 초등학교가 입학생이 없어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자 동문들이 들고일어나 모금을 했다. 우리 모교의 문을 닫지만 말아달라고. 학생은 없고 건물만 있는 것이 학교일까? 만나야지 남자가 기사가 되고 여자가 공주가 되지 않겠나.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