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48) / 유혹의 말 - 사윤수의 ‘샴푸 어강됴리’
샴푸 어강됴리
사윤수
샴푸 통에 깨알같이 적힌 샴푸 성분을 읽는다
성분의 세계가 번뇌 망상 따개비다
이걸 삼대 구 년 치성으로 머리에 칠하고 문지르면
언젠가 거품처럼 상상의 나래가 부풀어 오를까
샴푸의 요정으로 변할까
저 성분들,
귀신이 씨나락 까먹다가 목말라 물 먹으러 가다가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는 소리 같군
요정이나 귀신이나 한통속이지
저 마흔네 가지 성분을 뒤죽박죽 섞으면
트콜커터롤 코피즈틴룸 콘페벤
암모메틸 벤제메틸 이소치아 졸리논 졸리논!
아, 뭔가 환상적인 주문 같잖아
아랍국가 왕족 이름 같고
귀신 아니고는 찾아갈 수 없는 사막의 이름 같기도 하잖아
어쨌거나 손상된 머리에는
영양과 윤기를 줄 마법이 필요하대
그래도 당신은 샴푸하지 마
일 년 열석 달 윤기 없이
푸석푸석 봉두난발도 좋아
거품 빼고, 사막에서 헤매지 말고
그냥 보따리 싸서 내게로 와
내가 손상 없이 영양만 줄게
반짝반짝 왕으로 만들어줄게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그리고, 라는 저녁 무렵』(시인동네, 2019)

<해설>
「정읍사」는 백제시대 때 정읍의 한 행상인이 행상하러 나갔다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내가 망부석에 올라가 남편이 돌아올 길을 바라보며 혹시 밤길을 가다가 해를 입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지어 부른 노래라고 한다. ‘제가 이렇게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무사하신가요? 보고 싶어요.’ 뭐 이런 뜻이 담겨 있는 백제가요의 별 뜻 없는 후렴구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를 그래서 시의 결구로 삼았나 보다.
시인은 샴푸 통에 깨알같이 적힌 성분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이 시의 원 발표작에는 마흔네 가지 성분이 다 적혀 있었다. 세상에, 머리카락에 영양과 윤기를 준다는 샴푸가 이렇게 많은 화학 성분으로 만들어진다니! 나는 제조일자도 안 보고 식품을 사 먹다가 뒤늦게 후회할 만큼 무딘데 앞으론 약을 사도 부작용이 없는지 설명서를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사윤수 시인을 본받아야겠다.
이 시의 요체는 유머센스다. 그리고 주제는 사랑 고백이다. 그대가 샴푸를 쓰지 않고 머리도 여러 날 안 감아 봉두난발이 되어도 괜찮다, 내게 와다오, 그대를 “반짝반짝 왕으로 만들어줄게”라고 말한다. 아아, 샴푸를 하지 않아도 샴푸의 요정이 나타나려나. 누가 저런 고백을 문자로라도 한다면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다. 눈에 콩깍지가 씌면 일 년이 열석 달이 되나 보다. 사랑은 ‘마법’이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