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55) / 오늘은 크리스마스 - 허형만의 ‘홀로 걸을 때’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55) / 오늘은 크리스마스 - 허형만의 ‘홀로 걸을 때’
  •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12.25 08:00
  • 댓글 0
  • 조회수 296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55) / 오늘은 크리스마스 - 허형만의 ‘홀로 걸을 때’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55) / 오늘은 크리스마스 - 허형만의 ‘홀로 걸을 때’

  홀로 걸을 때

  허형만   


  이 신선한 바람이 얼마나 달콤한지
  나도 모르게 입맛 다시며 두 손 모아 기도하네.

  이 초록 내음이 얼마나 귀를 간질이는지
  나도 모르게 귀를 활짝 열고 그분을 찬송하네. 

  햇살은 나뭇잎 위에서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고
  멧새 두 마리가 가지 사이로 윤슬처럼 통통통 튀네.

  홀로 걸을 때,
  나는 혼자가 아니네.

  바람과 초록 내음과 햇살이 
  수호천사처럼 동행하고 있네.

  —『바람칼』(현대시학사, 2019)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55) / 오늘은 크리스마스 - 허형만의 ‘홀로 걸을 때’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해설>

  오늘은 케이크를 먹는 날이 아니다. 오늘은 영화관에 가서 사람을 마구 죽이는 장면을 재미있어 하면서 보면 안 된다. 성경을 숙독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 이라면 크리스마스라고 흥청망청한 분위기에 휩쓸려 들떠서 보내진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게 될 것이다. 오늘만은! 몸이 아픈 사람을 위해, 마음이 아픈 사람을 위해. 소외된 사람을 위해, 궁핍한 사람을 위해.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 중동의 총상 입은 아이들을 위해. 예수는 나누려고 왔던 분인데 나는 왜 잔뜩 모으려고 하는지. 예수는 깨어 있으라고 외쳤는데 나는 왜 흐리멍덩히 취해 있는 것인지. 

  허형만 시인의 새 시집 『바람칼』의 제4부는 가톨릭 신자 가브리엘이 쓴 시편이 모여 있다. 시를 읽으면서, 함께 기도하게 된다. 

  화자는 뒷동산을 산책하고 있다. 신선한 바람과 초록 내음과 반짝이는 햇살, 그리고 통통통 뛰는 멧새가 있는 뒷동산에서 시인은 신성을 느낀다. 나도 모르게 두 손 모아 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흥얼거린다. 우주만물을 생각하면 너무나 신비롭지 않은가. 나는 빅뱅 이후의 팽창, 블랙홀, 안드로메다 성운, 핼리혜성, 달과 별, 태양 에너지 같은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신비롭다. 베란다 식물의 잎사귀 하나도 신비롭다. 이 세상 모든 ‘존재’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져야 하는데 어디 그런가. 콧대는 높아 하늘을 찌르고 영원히 살 것처럼 타인 앞에서 오만불손한 것이 바로 나다. 

  허형만 시인은 ‘겸허함’의 뜻을 알고 있다. 바람과 초록 내음과 햇살이 수호천사처럼 동행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시인인 것이다. 뒷동산을 홀로 걸으면서 혼자가 아님을 알고 있다. 자기를 버려 인간을 도운(이것을 기독교에서는 ‘구원’이라고 한다) 살신성인의 생애를 묵상하자. 마구간에서 태어나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그분의 아주 짧았고 더없이 뜨거웠던 생애를 생각하면서 오늘은 모두모두 경건하게 보냈으면 좋겠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