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61) / 독립운동을 한 곳 - 박순화의 ‘취원창 가는 길’
취원창 가는 길
박순화
얼어서 죽을 각오 맞아서 죽을 각오로
독립의 길 가물한 황무지 소똥 길엔
석주의 비장한 총대 옥수수로 서 있다
굶어서 죽을 각오로 압록강을 넘어서며
일백 번 흔들려도 흔들려서는 안 된다던
석주는 큰 뜻 품고서 취원창에 뉘었다
아리랑 아라리요 목에 메어 부르며
태극기 흔들었던 서슬 퍼런 돌개바람에
석주는 망부석 되어 안동가를 읊는다.
—『한국 문학인』(한국문인협회, 2019년 겨울호)

<해설>
오늘이 2019년의 마지막 날이다. 올해는 3ㆍ1운동 100주년이 되는 의미 깊은 해였기에 섣달그믐에 이 시조의 뜻을 가슴에 새기며 보내기로 했다.
취원창(聚源昶)은 항일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행정구역이 지금은 흑룡강성 아성구 거원진이다. 취원창의 대표적 인물은 석주 이상룡(1858~1932)이다. 1990년 국가보훈처의 노력으로 국내에 봉환됐으며, 국립묘지 임정요인 묘역에 안치되었다. 안동 태생인 석주는 을미사변(1895) 뒤 박경종과 함께 가야산에 군사 진지를 구축하고 의병 항전을 시도하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찾아보았다.
“3ㆍ1운동 뒤 한족회를 바탕으로 5월 군정부가 조직되자 총재로 추대되었다. 같은 달 신흥중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해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였다.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해외독립운동 선상에서 하나의 정부만 있어야 한다는 이상룡의 주장에 따라 11월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개칭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였다. 이상룡은 서로군정서 독판(督辦)을 역임하였다. 1921년 1월 서로군정서와 의용군 일부를 정비해 남만통일회를 개최, 서간도일대의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을 통합해 대한통군부를 조직하였다.”
석주의 독립운동 중 일부를 인용하였다. 한평생 초지일관, 일본에 맞서 싸운 분이었다. 박순화 시인이 보건대 평생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맹세한 것은 얼어서 죽을 각오, 맞아서 죽을 각오, 굶어서 죽을 각오를 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압록강을 넘어간 것은 이미 목숨을 내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제에 아부하여 부귀영화를 누린 이가 어디 한둘이었던가. 임시정부에서도 국무령을 했는데 대쪽 같은 성품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우리의 독립이 미국의 전쟁 개입과 원폭 투하로 말미암았다고 말하지만 이런 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굴욕의 역사밖에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얼마 전에 경기도 안성에 있는 3ㆍ1운동기념관에 평생교육원 수강생들과 다녀왔다. 올해가 3ㆍ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여서 그냥 보내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