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68) / 고놈이 고놈이라고 한다-배연수의 ‘유권자’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68) / 고놈이 고놈이라고 한다-배연수의 ‘유권자’
  • 이승하 시인
  • 승인 2020.01.07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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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68) / 고놈이 고놈이라고 한다-배연수의 ‘유권자’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68) / 고놈이 고놈이라고 한다-배연수의 ‘유권자’ 

  유권자 

  배연수

   
  투표날 아침
  외출하기 위해 옷장 문을 열었다
  갈아입을 옷들이 빼곡히 걸려 있지만
  입고 나갈 옷은 선뜻 보이지 않는다

  옷장 속의 옷들은
  흰색과 검은색 사이에서
  우쭐해져 있거나
  배경처럼 드러누워 있다

  후줄근해 보인다는 공통점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게 없는 옷들

  오늘 입을 옷이 단 한 벌뿐이라는 사실과
  들여다볼수록 묘하게 닮아 있는 모습들
  사이에서 숨이 차다

  사람들은 옷을 보고 나를 봤다고 말하겠지
  망설임 끝에 접혀 있던 옷 한 벌을 꺼내 들었다

  옷장 속은 헝클어진 채 다시 어둠에 갇히고
  이 시간의 갈등은 먼지처럼 가라앉을 것이다

  서둘러 문을 닫았지만
  지난번과 똑같은 후회가 여벌로 따라 나왔다

  -『그냥 흐림이라고 대답하겠다』(시인동네, 2019)

사진=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68) / 고놈이 고놈이라고 한다-배연수의 ‘유권자’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해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그래서 의회가 정치의 근간이다. 입법부와 사법부와 행정부 중에서 근간은 입법에 있다. 법을 일단 만들어야지 행하든지 지키든지 할 것이 아닌가. 4월 15일에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를 하는데, 그래서 이 시가 시기적으로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배연수 시인은 투표하는 날 입고 나갈 옷이 마땅히 없다는 것으로 이 시를 풀어 나가는데, 독자는 금방 눈치 챘을 것이다. 사실은 찍어 줄 만한 후보자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도 울며 겨자 먹기로 후보자 증에서 선택해서 투표권을 행사하긴 했지만 결과는 늘 시인을 배신했던 모양이다. “지난번과 똑같은 후회가 여벌로 따라 나왔다”는 것은 자신이 선택했던 이가 당선을 했든 낙선을 했든 간에 당선자의 의정활동을 보면 “눈에 들어오는 게 없는 옷들”과 마찬가지다. 이 시의 장점은 시 전체가 은유이기도 하고 환유이기도 하고 알레고리이기도 하고 아이러니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신동문의 「비닐우산」이라는 시가 문득 생각난다. 

  이번 총선에서 뽑힌 이들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불법을 일삼지 말았으면 좋겠다. 법을 만들어야 할 사람들이 법을 지키지 않고 세비를 타가니 ‘백성’들이 분노하는 것이다. 새 옷을 산뜻하게 입은 사람들이 국회에서 자기 당이 아닌 백성을 위해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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