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71) / 탈북자의 불안-이하의 ‘배춧속 버무리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71) / 탈북자의 불안-이하의 ‘배춧속 버무리며’
  • 이승하 시인
  • 승인 2020.01.10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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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71) / 탈북자의 불안-이하의 ‘배춧속 버무리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71) / 탈북자의 불안-이하의 ‘배춧속 버무리며’ 


  배춧속 버무리며
  ㅡ북경일기 4

  이하


  갑자기 먹고 싶어 조선족 아줌마를
  찾았습니다. 제 몸보다 큰
  고무함지 들고 찾아온 아줌마
  우린 한데 앉아 배추를 버무렸습니다.

  겉절이 한입 그득 물고 나는 내가 자란 옥천을 얇게 썰었고, 아줌마는 떠나온 길림성을 솎았습니다. 저물 무렵, 아줌마의 외투가 울었습니다.
   
  뭬에, 북서 넘어온 게 탄로 났네?
  조선족이라고 우기디 그랬니.
  알갔어, 알갔어야
  니들도 먼저 피하라우……

  배춧잎처럼 파리한 얼굴로 아줌마는 김치를 바라보았습니다. 비닐장갑 낀 채 온 길 내달리며 뒤돌아보던 아줌마, 앞길 훔치며 그녀는 거푸 내달렸습니다. 

  아줌마가 놓고 간 고무함지 속에는
  함경도 어디쯤도 섞여 있을까.
  버무리다 만 김치를 어쩌지 못하고 
  나는 오래도록 
  한자리에 서성였습니다.

  -『내 속에 숨어 사는 것들』(실천문학사, 2012)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71) / 탈북자의 불안-이하의 ‘배춧속 버무리며’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해설>

  시인 이하가 북경 등 중국의 북쪽 지방을 떠돌았을 때 얻은 소재를 갖고 쓴 시다. 화자가 북경에서 김치가 먹고 싶어 조선족 아줌마를 찾았는데 알고 보니 그이는 탈북자로서 길림성을 거쳐 북경에 와 있는 사람이었다. 시의 제3연은 통화 내용 같다. 조선족 아줌마로 소개받은 이와 화자가 어울려 배추를 버무리는데 아줌마가 어디에선가 걸려온, 피신하라는 전화를 받더니 비닐장갑을 손에 낀 채로 온 길을 내달려 줄행랑을 치는 것이었다. 북경도 안전한 은신차가 아니었던 터라 누군가 귀띔을 해주자 김치고 뭐고 다 팽개치고 목숨을 건 도주를 하는 광경이 한 편의 시가 되었다. 이 시가 경험 내용의 솔직한 기술에 그쳤다면 범작이 되었겠지만 제2, 5연의 시적 형상화가 수작의 반열에 올려놓지 않았나 여겨진다. 

  이 시는 중국의 수도에 숨어들어 살고 있는 북한동포 아줌마의 딱한 처지가 눈에 보이듯이 그려진 사실적인 시다. 대화체를 그대로 쓴 제3연은 가슴을 따갑게 할 정도로 감동과 충격을 준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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