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81) / 개의 수난 – 엄인옥의 ‘접두사 개에 들리다’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81) / 개의 수난 – 엄인옥의 ‘접두사 개에 들리다’
  • 이승하 시인
  • 승인 2020.01.20 0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81) / 개의 수난 – 엄인옥의 ‘접두사 개에 들리다’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81) / 개의 수난 – 엄인옥의 ‘접두사 개에 들리다’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81) / 개의 수난 – 엄인옥의 ‘접두사 개에 들리다’

  접두사 개에 들리다 

  엄인옥


  등교하는 학생들 뒤따라 걷는데
  어떤 낱말에도 
  대화는 온통 접두사 개를 붙인다

  개허탈 개급처 개깜놀
  개이뻐 개귀여워 개아름다워 개맛있어 개짱 
  긍정과 부정 사이 은어가 넘나드는 
  그들은 왜 개를 붙이기 시작했을까
  활자에 길들여진 아이들 개판 오 분 전이다  

  대학 캠퍼스
  개좋아 개구리다 개싫다 개매너 개안습 개멍청하다  
  킹 왕 짱 캡 제치고 어디든 척척 달라붙는다 

  야산이 좋아하는 
  개복숭아 개오동나무 개박달나무 
  쓰임이 많던 조선시대 
  개살구 개잡놈 개망나니 개수작 개죽음 개무시
  보릿고개엔 개떡 
  가슴에 응어리졌을 때 혼잣말 개새끼

  대대로 내려오는 꽃
  개여뀌 개나리 개불알꽃 개별꽃 개망초 개양귀비

  홀로 부엌과 종종걸음 쳤던 개여울에서 
  며느리밥풀꽃 며느리배꼽풀 며느리밑씻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도 개 붙었을지 모를 일이다

  음식점에서 상추쌈 서로 먹여주는 개부부 
  들키면 개망신
  강남 금싸라기 땅에 뿌리내린 개똥참외 개부럽

  사과 박스에 오만 원 권 
  한 뭉치씩 빼 쓰는, 지난밤의 개꿈

  -『접두사 개에 들리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2017)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81) / 개의 수난 – 엄인옥의 ‘접두사 개에 들리다’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해설>

  ‘개’를 개살구나 개머루에 쓸 때는 귀여웠다. 개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접두사에 개를 너무나 많이 붙여 쓰고 있는 지금의 언어 습관이 얄밉다. 예전에는 개꿈이나 개수작이나 개죽음 정도로만 썼는데 지금은 강조하는 말마다 ‘개’를 붙여 쓴다. 개들아, 정말 미안하다. 

  아마도 개를 이렇게 많이 쓰게 된 것은 개가 우리 인간과 가장 친밀한 동물이고, 또한 오랜 세월 개들이 인간의 삶 한복판에서 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고양이는 도도한데 강아지는 애교스럽다. 견공에서 애완견으로, 애완견에서 반려견으로 지위(?)도 승격되었지만 인간세상에서 개는 이렇게 무시당하고 있다. 접두사 ‘개’는 어느 때부터 별로 안 좋은 것에 붙여 쓰게 되었다. 아니, 나빠도 개, 좋아도 개, 슬퍼도 개, 기뻐도 개다. 

  까마득한 옛날 우리 조상은 개가 웃을 일이다,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산다, 개도 나갈 구멍을 보고 쫓아라, 개도 주인은 알아본다, 개 팔자가 상팔자다, 개 발에 편자, 개 못된 것은 들에 가 짖는다 등 개가 나오는 속담을 많이 지어 썼다. 개의 속성을 잘 알고서 개에 빗대어 인간세상을 풍자하고 교훈을 주기 위해서였다. 

  이 시에서 사과 박스 안의 돈뭉치는 불법 정치자금과 돈세탁을 상징한다. 서민은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오만 원 권 돈뭉치다. 우리 중 개만도 못한 사람이 꽤 있어서 ‘개’를 접두사로 썼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날에도 개는 사람에게 충성을 다하는데 현대인은 개를 유기한다. 유기견은 주인이 안 찾아가거나 키우려는 사람이 없으면 열흘이나 보름 정도 사료를 주다가 안락사 시킨다. 세상의 개들에 대해 측은지심을 갖지는 않고 개 개 하면서 놀리고 있으니 개들이 더 불쌍하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