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하면 그녀를 잡을 수 있을까 그 궁리 중이냐?”
그 소리에 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뭐라고? 그녀를 알아?”
“이건 또 뭔 일이래. 느그 할아버지 유산 말이다. 유. 산.”
친구 녀석은 입만 열면 돈 타령을 했다.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상속 조건을 우연찮게 들은 뒤로는 무슨 당첨 확률 20배 로또나 되는 것처럼 친구끼리 얼마를 나누네 마네, 떡 줄 사람에겐 묻지도 않고 김칫국부터 마셨다.
“흥. 표정 보니까 알겠군. 지나가는 말에도 다 진실이 묻어 있거늘. 어떻게 하면 유산을 받을 수 있을까 그 궁리 중이냐고 물었다만. 아니 그년은 대체 누구야? 미안, 말이 헛나왔다. 그. 녀. 응? 누군데!”
동생이 먼저 건 싸움이었다. 그들의 약속 장소로 달려가면서, 어떻게 하면 그녀를 가로챌 수 있을까 궁리궁리하다가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바로 그녀의 앞에서.
“으아악!”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입맞춤>이 눈에 띄었다. 브랑쿠시의 연작 중 하나였다. 로댕의 영향을 받았다지만 조수로 일한 건 잠깐이었다. 로댕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최소한의 소박한 표현 등이 기억났다. 한 몸처럼 꼭 껴안은 남녀가 마음을 나누는 순간. 저 <입맞춤> 말고는 기억나는 게 거의 없었다. 입체적인 조각품이 한낱 사진으로 액자에 갇힌 게 꼭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왼쪽 다리엔 깁스를 한 상태였다. 팔등을 덮은 거즈를 들춰 보니 꿰맨 상처는 아니었다. 특별히 심한 부상을 입은 곳이 더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발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조금씩 감각이 돌아오는 듯했다.
비명 소리를 들은 건지 문을 열고 뛰어들어온 것은 그녀였다.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에서 얼마나 걱정하고 있었는지 알 만했다. 공원 입구에 서 있는 그녀를 본 순간 횡단보도 앞에서 내가 허둥대다 그만 사고가 났다고, 그녀가 설명해 주었다.
답답하다고 문은 열어 둔 채였다. 멀찌감치 서서 지켜보던 청년이 나를 노려보면서 지나갔다. 그녀가 자리를 비웠을 때 찾아와서는 자신이 동생이라고 말했다.
바쁜 부모님과 친구들이 다녀간 뒤로 내 곁을 지키던 그녀가 전화를 받고 놀라 뛰어 나갔다. 곧이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동생이 이제 와 한다는 소리가 일란성 쌍둥이란 사실을 모르게 하고 싶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빼앗고도 모자라서 이젠 하나 남은 내 사랑까지…. 형이 어떻게 이래? 유산 때문에!”
“너도 그깟 유산 때문에 사랑 타령이잖니. 아픈 형한테 소리나 지르고….”
“내가 먼저 만났어. 형도 알잖아. 내가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여자야. 아직은 그녀가 모르는 눈치지만. 아니, 곧 알게 될 거야. 누가 진짠지.”
“근시여도 장님은 아니지. 그녀가 과연 모를까? 바보가 아니고서야.”
“다 돌려놓겠어!”
동생은 이쯤에서 그만두라고, 아니면 다 까발리겠다고 내게 악을 썼다.
의사가 들어오는 바람에 당황한 동생이 휙 나가 버렸다. 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의사는 똑같은 형제간의 대화가 참 솔직한 것 같다면서, 기억이 쉬이 돌아오지 않으니 경과를 좀 두고 보자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찾아오는 시간에는 대개 잠든 척했다. 그녀는 내게 동생과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 시시콜콜히 다 털어놓았다. 기억만 제외하면 거의 완쾌된 나를 위해 그녀가 추억을 되살릴수록 연극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새벽에 다시 찾아온 동생이 주스 병을 내밀었다. 컵을 가져와 따르며 말했다.
“형이 제일 좋아하는 건데, 기억해? 물론 기억 안 나겠지.”
나는 동생에게 휴게실의 정수기에서 물 좀 떠오라고 부탁했다. 그사이 친구가 지난밤에 가져온 럼주를 가방에서 꺼내 동생의 체리 주스 컵에 탔다.
“머릿속의 기억을 지우는 건 시간밖에 없는데.”
“어떻게 알았어? 시간의 약이래. 약사가 그렇다니까 그런 건가 싶긴 한데. 기억을 지우는 약이면 감정의 진통제 같은 걸까? 뭐 오만가지를 섞었겠지. 그중 프로프라놀롤인가 뭔가는 현재 올림픽 금지 약물이라고…. 어? 그럼 위험한 건가? 소, 소량은 괜, 괜찮겠지?”
친구가 도와주겠다며 발 벗고 나서서 구해온, 기억을 지우는 마법의 약. 뜬금없는 럼주 타령에 내가 무협지 너무 본 것 아니냐고 했더니, 녀석은 무협지에 뭔 럼주냐며 피식 웃고 돌아갔다.
그걸 마신 동생은 주정뱅이처럼 비틀거리더니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간이침대에 쓰러지던 동생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고…, 말한 것 같은데 확실치 않았다.
어느 한쪽이 무기력해지거나 죽어야 끝날 싸움이었다. 우리의 약속 장소로 달려가면서, 어떻게 하면 그녀를 붙잡을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나는 또 교통사고를 당했다. 바로 그녀의 앞에서.
사고로 얻었으니 사고로 한순간에 잃게 되는가 싶었는데 그 순간, 언제 뒤따라온 건지 동생이 나를 밀쳐내고 큰 부상을 당했다. 덕분에 나는 무사했으나 내 심장은 나가떨어진 충격과 그녀의 두 눈에 얼어붙은 공포와 기피에 중상을 입었다. 응급실에서 동생을 붙들고 내 이름을 부르면서 울부짖던 그녀의 목소리가 내 안을 마구 헤집으며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그렇게 동생은 얼마 전 나처럼 기억을 잃었고, 장담했던 대로 돌려놓았다.
그녀는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이 병상을 지키고 있었다. 그 영악한 한결같음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사랑한 것은 무엇일까? 사랑하긴 했나? …많이 사랑하긴 했나 보다. 그녀가 기다리는 건 누구일까?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선택한 이상 기다릴 것이다.
‘거기 누워 있는 건 애먼 놈이라고! 여기 서 있는 게 진짜 나라고!’
나는 당장이라도 병실로 돌진해 브랑쿠시의 <입맞춤>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액자에 갇힌 조각품을 놔준 뒤, 흩어진 유리 파편들 속에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그녀에게 설명을…. 뭐 그러든지 말든지 그녀는 이해한다는 얼굴로 나를 일별하고는 동생을 그윽이 쳐다볼 것이다. 이제 누구든 상관없는 환자 곁을 지킬 것이다.
답답하다고 문은 열어 둔 채였다. 멀찌감치 서서 지켜보던 나는 동생을 노려보면서 지나갔다. 그녀가 자리를 비웠을 때 찾아가서는 형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가만히 누워 있던 동생의 꾹 다문 입가가 실룩거린 것 같았다.
그것이 경련인지 미소인지는 모르겠다. 처음 든 생각은 모르겠다는 것이었고, 내겐 조금 벅찬 일이라고 느꼈다. 결국 둘은 서로 배신하지 못하고, 담합과 협력을 선택해 사이좋게 이익을 나누게 될까. 나는 왜 내가 아닌가. 어떤 순간이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인지는 알기 어렵다. 사소한 순간의 선택이 삶을 결정지어 버렸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에서처럼 확실한 과거의 기록을 모두 태워버리고 떠날까, 최면술사를 찾아가 기억을 지울까, 멀리 갈 것도 없이 럼주를 마실까. 아니면 …또. 다시 선택의 시간이 되었다.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소모전이다.

소설가
1973년생, 2018년 단편 <당신의 신발>로 제1회 직지신인문학상 수상, mihonin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