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85) / 사랑하니까 아픈 것이다 - 김사인의 ‘연시를 위한 이미지 연습’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85) / 사랑하니까 아픈 것이다 - 김사인의 ‘연시를 위한 이미지 연습’
  • 이승하 시인
  • 승인 2020.01.2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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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85) / 사랑하니까 아픈 것이다 - 김사인의 ‘연시를 위한 이미지 연습’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85) / 사랑하니까 아픈 것이다 - 김사인의 ‘연시를 위한 이미지 연습’


  연시(戀詩)를 위한 이미지 연습

  김사인 
 

  1. 고백

  골목을 돌아나왔다
  바람을 죽이고
  바람의 흰 알몸을 죽이고 대신 바람이 되어 돌아나왔다
  죽은 머리칼 하나가 암호처럼 이마에 붙어서서 나를 흔든다
  바람은 죽어도 바람, 
  머리칼은 꿈틀거리며 슬퍼하라 슬퍼하라 말한다

  슬픔은 꿈속에서나 오는 것이라기에
  나는 흔들릴 때마다 넘어지려 애썼다
  넘어져 잠들려고 애썼다
  넘어져서도 이젠 어릴 때처럼 울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야 몰래 울었다
  머리칼도 소리 죽여 따라 울었다

  서투르게 잠든다
  바람을 만나 이 알몸을 돌려주리라, 이 머리칼을 돌려주리라
  하나 아무도 내게 빈손을 보여주지 않는다
  꿈속에도 나는 비틀거리며 골목을 돌아 나오고
  그러다 비가 되어
  아무 집 담장에나 무심히 얼룩진다
  비로소 바람은
  담장에도 분다

  2. 우산 속의 꿈

  이리 와
  남루한 우산 속에
  우리의 두 손이 부딪치도록
  저것 봐, 우리의 눈빛이 빗물에 씻겨가는 걸
  씻겨가 몸살 앓으며 사방에서 꺼져가고 있는 걸,
  한데, 우리의 발자욱 속엔 무엇이 고여 잠시나마 빛나며 남아 있는 걸일까

  잃어버린 온갖 것들은 풀잎 위에 찬란히 반짝이는데
  뒤에 숨어 우리가 만나는 것은 부끄러운 졸음뿐
  숨어야지 우리는
  우산 속으로
  숨어, 저 비 속에서 우리의 맑은 모음을 거두어들이고
  매끄러운 허리를 그대에게 보여줘야지
  그대의 흰 이빨을 옆구리 연한 살점 위에 얼마나 아프게 느껴보고 싶은 내 몸인데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저 작은 빛다발이 기어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
  마지막 잠자리를 밝혀주다가
  결 고운 머리칼로 우리의 꿈속을 저도 꿈꾸며 헤집고 다니려나
  우리 두 손이 닿았던 자리에 남은 저릿한 아픔, 스러져 잠들지 못하는 저 아픔은
  이제 누구의 것이 되어 빛보다 밝은 어둠으로 비 속에 서 있는 것일까

  내 추운 이마가 그대의 가슴에 닿을 때
  보인다 우리의 뒷모습이
  버릇처럼 팔을 젓다가
  저녁이면 빈 바다만 하나씩 안고 돌아눕는
  우산의 뒷모습이  

  3.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조가 다가오는 인천 뻘밭에
  옆으로 기는 새끼 게 되어 만나랴
  갑각의 등은 잠시 벗어두고 속살끼리 만나랴
  그렇게 어우러져 꽃불 티우고 살과 피 한데 엉겨 한 이불 덮으면
  벗은 우리의 등이 시렵지 않으랴
  살 속으로 살 속으로 서로 불러도
  우리의 등에는 인천 뻘밭 찬비 내리고
  두고 온 껍질의 울음소리에
  부끄러우리, 잠이 깨도 깨지 않을 이 목마름

  신탄(新灘) 강가에 두 마리 모래무지 되어 만나지
  한 모래 먹고 한 물 마시고
  종일 꿈꾸는 얼굴로 만나지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둘 다 죽어버리면
  빈 강은 남아 외로워할 거다
  아하, 바람처럼 소리를 낼 거다
  뚜벅뚜벅 말을 할 거다

  흘러가자 우리
  물이 되어 흐르노라면
  우리 두 목숨 사이로
  지난날 흘리고 온
  우리의 목소리와 몸짓들이
  함께 젖어 흐르겠지
  그 긴 흐름 속에서 우리는 만나
  부끄러움 없이 우리의 아이를 낳아 키우고
  키워 저 어둠 속으로 또 흐르게 하자

  ―『밤에 쓰는 편지』 (청사, 1987)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85) / 사랑하니까 아픈 것이다 - 김사인의 ‘연시를 위한 이미지 연습’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해설>

  이 시를 처음 읽은 지면은 대학신문에서였다. 아마도 1978년쯤이 아니었을까. 국정교과서에 실려 있는 시만 읽고 읽고 또 읽으며 예비고사를 준비하고 있던 시절에 이 시를 읽고 푸르르 전율하였다.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제목부터 사람을 미치게 하더니, 시가 사람을 죽여버렸다. 나는 교과서를 덮었고, 시험을 포기한 상태에서 시험을 쳤다. 1979년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입시는 본고사에 국어와 영어와 실기(작품 창작) 3과목이 있어서 운 좋게 합격을 했다. 

  시를 외울 정도로 읽었다. 바람을 죽이다니. 바람의 흰 알몸을 죽이고 대신 바람이 되어 돌아 나오다니. 모든 시행이 패러독스였고 각개 연은 아이러니였으며 시 전체는 사람을 마음 놓고 사랑할 수 없게 하는 주변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적 표현이었다. 

  ‘사랑’이라는 낱말은 대중가요 두 곡 중 한 곡에 들어 있을 만큼 흔하지만 연시를 잘 쓰기란 정말 어렵다. 대체로 센티멘털리즘에 빠지거나 감정과잉이 되고 만다. 이 시는 자연계와 인간계가 조화를 이루면서 진행이 되는데, 결국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행위는 남녀가(혹은 암수가) 사랑한다는 것이다. “부끄러움 없이 우리의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지만 그런 자연스러움은 현실을 거역할 때만 가능한 것이어서 사랑하는 이들은 동시에 아픔도 껴안을 수밖에 없다. 사랑과 아픔이 한 몸인 상태를 견디지 못한 이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결별한다. 사랑하니까 아픈 것이다. 김사인 시인은 학부 시절에 이 시를 썼을 텐데, 시인은 이 시를 썼던 시절에 어떤 사랑을 했는지, 이 시만으로는 알 수 없는 시인의 연애담이 지금도 몹시 궁금하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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