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정가제는 책의 생산자인 출판사가 붙인 책값을 소매 가격(=독자 구매가격)으로 정하는 가격제도다. 출판시장의 규모는 대체로 언어권의 규모와 비례하는데, 비영어권의 출판 선진국들(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이탈리아, 일본 등)이 한결같이 강력한 도서정가제를 택하고 있다. 만약 출판시장에서 일반 소비재처럼 자유가격제를 시행하면 규모의 경제와 광폭 할인 판매가 가능한 대형 출판사와 대형 온·오프라인 서점만 살아남을 것이다. 이는 도서정가제의 핵심적 가치인 생산-유통-소비의 다양성 확보에 반한다. 크고 작은 다양한 출판사에서 다양한 저자의 책을 펴내고, 고래와 새우가 함께 숨 쉬는 바다처럼 큰 서점과 작은 서점들이 공존하는 환경을 만들어서 종국적으로 독자의 책 구매 접근성과 책 선택의 다양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자는 것이 도서정가제의 취지다. 소수 언어권에서 책의 이해관계자인 저자-출판사-서점-도서관-독자 모두를 위한 가격제도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도서정가제가 할인을 제한시켜서 출판사와 서점의 배만 불리고 소비자를 봉으로 만드는 반소비자 정책인 것처럼 오해한다. 자유가격제에 비해 책값이 비싸질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확증 편향이다. 일반 소비재는 소매 단계에서 판매점들이 가격 경쟁을 하는 데 비해, 정가 판매 제도에서는 가격을 붙이는 생산 단계에서 출판사들이 치열하게 경쟁 가격을 책정한다. 국내에서 1년간 발행되는 신간이 8만 종 이상이고 비슷한 유형의 책값이 거의 비슷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출판사는 마음대로 가격을 올리기가 어렵고 ‘눈치 가격’이라고 할 정도로 강도 높은 경쟁 가격을 붙이기 때문에 생산 단계부터 가격 인상 억제 효과가 작동한다.
책도 상품인 이상 책값이 인상 추세이긴 하지만 전체 소비자 물가에 비해서는 낮게 억제되고 있다. 2015년 기준(100.00) 2018년의 출판물 물가지수(103.41)는 전체 소비자 물가지수(104.45)보다 인상률이 낮았다(통계청 물가지수). 또한 도서의 평균 정가는 2010년 12,820원, 2014년 15,631원, 2018년 16,347원으로 도서정가제 강화(2014년 11월) 이후 더 낮은 수준으로 올랐다(대한출판문화협회 통계). 장기적으로 보더라도 1975년 대비 2018년의 임금 및 물가 수준은 1인당 월평균 임금이 61배(46,000원 → 2,810,000원), 설렁탕은 27배(257원 → 7,000원), 종이신문 1개월 구독료가 25배(600원 → 15,000원), 영화 관람료가 17배(500원 → 8,500원) 오른 데 비해 도서의 평균가는 13배(1,276원 → 16,347원) 오르는 데 그쳤다. 유럽 상황을 보면 정가제가 없는 영국에서는 1996년부터 2018년 사이에 평균 가격이 80%나 올랐으나, 같은 기간 동안에 정가제가 있는 독일은 29%, 프랑스는 24% 인상되는 데 머물렀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나라의 현행 도서정가제는 진짜 정가제가 아니라 ‘가격 할인 제한 제도’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전국 어디서나 동일한 책을 같은 가격에 판매하여 일물일가(一物一價)를 적용하는 것이 ‘진짜 도서정가제’인데, 현행 도서정가제는 10% 할인과 5% 마일리지 등 정가의 15% 이내의 직간접 할인을 보편적인 혜택처럼 허용하기 때문이다. 공정거래법의 재판매가격유지제도에 의해 종이신문은 월 정기구독료와 1부 판매가가 정가여서 전형적인 정가제에 해당한다(신문사가 붙인 가격이 소비자 가격이다). 다른 한편으로 정가제와 무관한 스타벅스 커피의 경우 전국 어디서나 메뉴별로 동일한 가격에 판매하여 정가제 방식을 취하고 마일리지를 적용하지만 가격 할인은 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 정작 정가제를 한다는 도서 시장에서는 할인 10%와 마일리지 5%(소비자에 대한 경제상의 이익 15% 제공)가 인정된다. 이런 옵션을 모두 사용하는 대형 인터넷서점은 흥하고, 출판사의 공급률 차별로 인해 할인이 어려운 오프라인 서점들은 시장 규모가 축소되는 중이다. 이는 한국식 현행 ‘무늬만 도서정가제’가 초래한 기울어진 운동장(온·오프라인 불균등 발전)의 문제다.
현행 법제는 15%의 직간접 할인을 염두에 두고 출판사가 책값을 올려서 정하도록 하면서 거품 가격을 구조화시켰다. 이처럼 소비자를 기만하는 명목상의 할인을 없애자는 것이 ‘완전 도서정가제’이다. 완전 도서정가제를 하게 되면 불필요한 거품 가격이 빠질 것이고 소매점마다 가격 차이가 사라져서 규모가 작은 오프라인 서점이 보다 많이 생겨날 것이다. 이것은 독자가 책을 직접 만나는 공간이 그만큼 많아지는 것으로 독자에게도 이익이다. 2014년 도서정가제 강화 이후 학습참고서를 취급하지 않는 개성 있는 독립서점이 500여 개나 생겨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때 직접 할인은 없애더라도 사업자의 마케팅 여지와 소비자의 구매습관을 고려해 5%의 마일리지 적립은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책값은 부가가치세(10%)가 면세되어 원천적으로 10% 할인 효과가 존재한다. 이웃 나라 일본은 지난 10월부터 책값의 부가세가 8%에서 10%로 인상되어 그만큼 소비자 부담이 커진 것과 비견된다. 우리는 완전 정가제를 해도 기본적으로 10% 할인이 적용되는 것과 같다. 웬만한 책은 공짜로 각종 도서관에서 실컷 볼 수 있는 준공공재적 특성도 고려되어야 한다. 세상에 책 말고 어떤 물건에 대해 소비(이용)를 촉진하는 별도의 시설과 전문인력을 갖추고 무료 서비스를 시행하는가. 책이 일반 소비재와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지난해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완전 도서정가제를 반대하는 청원 지지 국민의 수가 20만 명을 넘겼다. 책값이 저렴해지기를 바라는 국민의 뜻은 당연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청원인이 책 생태계와 출판시장의 어려움을 모두 도서정가제 탓으로 돌리고 도서정가제 강화 이후의 긍정적인 현상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악의적인 ‘정가제 파괴’ 주장이 만약 현실화된다면 어떻게 될까. 정작 독자인 국민에게 가장 큰 피해가 돌아갈 것이다. 할인 판매 전쟁이 가능한 소수의 독점적 출판사와 서점만 남는 시장이 되었을 때 독자가 얻을 수 있는 것은 큰 폭의 할인율뿐이며, 잃어야 할 것은 책 출판과 유통의 다양성, 오프라인 서점, 책값의 신뢰성이다.
2019년 9월 한국출판연구소가 실시한 ‘도서정가제 이해관계자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독자(도서 구매자 2,000명 조사)들은 책이 ‘소비상품’(10.8%)이 아닌 ‘지식문화상품’(79.9%)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 발행 부수가 1,600부 정도밖에 안 되는 신간이 연간 8만 종이나 발행되는 기이한 이 시장이 단순한 소비상품 시장일 리 없다. 나아가 ‘동일 도서의 전국 균일가 판매가 필요하다’(58.7%)는 의견이 ‘불필요하다’(20.5%)는 의견보다 3배 가까이 높았다. 그것이 곧 ‘완전 도서정가제’다.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청원인은 도서정가제 강화 때문에 국민 독서율과 도서 구입이 감소한 것처럼 주장했지만, 이 조사에 따르면 독자의 독서량과 도서 구입량 변화의 주된 이유(3순위까지 종합)는 ‘본인의 사회생활 변화’(66.2%), ‘스마트폰 이용 등 매체 환경 변화’(61.8%), ‘독서 이외의 여가활동’(59.9%) 순이었고 이어서 ‘가정환경 변화’, ‘변화의 계기가 있어서’, ‘도서정가제의 변화’(19.0%) 순으로 나타나 정가제 요인은 매우 작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종이책과 달리 새롭게 열리고 있는 전자책 시장의 경우 ‘정가 판매’ 이외에 ‘대여’나 ‘구독’ 모델과 같은 다양한 서비스 방식이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도 새로운 모델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물리적 속성에 기반한 종이책처럼 완전 정가제를 적용해서는 곤란하다고 본다. 사업자들의 선택에 따라 ‘정가’를 표기한 전자책 콘텐츠에는 정가제를 적용하고 기타의 판매 방식은 정가제 비적용 대상으로 하는 ‘선택형’ 가격 제도를 현재처럼 유지할 필요가 있다.
도서정가제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입장에 따라 다양한 찬반의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이런 의견 차이를 단순히 절충하는 방식으로는 현재와 같은 문제 투성이 가격제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현재는 정가제도 아니고 자유가격제도 아니다. 법제에 의한 15% 이내의 직간접 할인 인정에 더해, 민간 자율협약에 의한 제3자(카드사 등)의 15% 이내 할인을 추가로 인정한다. 명확한 정가제의 법리 대신 각각의 이해관계와 적당히 타협한 우리 사회 문화정책의 ‘이도 저도 아닌’ 한계를 보여준다. 책에 관한 가격제도 변화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할인율만이 아니라 독자인 국민의 전체 이익이 커지는 방향에서 논의가 진전되고 정책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눈속임 할인율이 아니라 독자의 도서 구매 편의성이 커지는 방향에서, 나무만이 아니라 숲과 산맥, 국토 전체를 보는 책 생태계 상생 정책이 추구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완전 정가제를 기본으로 하면서 출판계가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를 문고본과 페이퍼백 등 염가 도서로 출판하는 노력을 적극 기울일 필요가 있으며(원천적으로 저렴한 책 생산의 활성화), 지방자치단체나 학교 등은 도서관의 도서구입비를 충분히 확보하여 국민의 도서 대출 수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책값만 놓고 하는 논쟁은 책의 가치와 출판시장을 디스카운트시킨다. 그 대신 책과 독서의 가치가 더욱 커지는 미래의 책 생태계 구축에 기여하는 역동적이고 생산적인 논의가 확산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정부가 도서정가제에 대한 무소신과 절충주의에서 벗어나 책 생태계 문화정책에 대한 뚜렷한 철학과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출판계는 책의 공급자로서 책임감과 리더십을 갖고 문제 해결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출생
음력 1967년
소속
책과사회연구소(대표), 한국출판학회(부회장)
경력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