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99) / 역설의 묘미 - 박강의 ‘베이루트 독서’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99) / 역설의 묘미 - 박강의 ‘베이루트 독서’
  • 이승하 시인
  • 승인 2020.02.07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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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99) / 역설의 묘미 - 박강의 ‘베이루트 독서’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99) / 역설의 묘미 - 박강의 ‘베이루트 독서’

  베이루트 독서

  박강

    
  누구의 손때 한번
  타지 않은 책
  별똥처럼 반짝이다가
  사라진 시간, 몇 쪽 넘기자
  성운의 젖을 빤 태양이 죽죽 밑줄을 그어놓았다

  낙서족 알 무스타파는 그 밑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태양의 바퀴를 나는 매일 굴려야 했네. 사막 한가운데서 그건 보통 일이 아니었지. 슬로우 모션으로 건초 먹던 염소가 불볕 아래 무릎을 꺾고 고꾸라지고 말았어. 나는 염소의 심장을 꺼내 곱게 말려 지우개를 만들었지. 닿을 수 없는 레바논의 하늘만 그렸다 지우길 반복했어. 점점 지워지는 태양의 바퀴 자국 따라 철벽 같던 국경선이 무너져 내리네. 잠시 바람 불고 한순간의 휴식이 찾아들면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고* 친구여 이제 조금은 믿어도 될까?

  바람의 헛된 예언일랑 품에 묻고 다른 안식의 땅에 태어나길 꿈꾸는 것이네. 죽은 염소의 전생애를 캐묻듯 종이만 씹어대면서 말이야. 그렇게 무력한 나를 가까이서 먹구름이 손가락질하고 있어. 베이루트의 지평선 너머에서 저격병 같은 어둠이 몰려오네. 염소의 망령이 글자들 사이를 배회하기 시작하네. 코코넛 먹는 아이처럼 지우개 하나로 태양의 속살을 파먹으며 견뎌온 계절. 속속들이 먹어 치우고도 제 살 깎으며 안으로 단단해지는 지우개를 갖고도 난 한번 웃지 못했던 것인데

  그러니 친구여 페이지를 넘길 때면 기억할 것이 있네. 부서진 태양 마차의 조각들이 행간여백 따라 실구름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고이 간직해온 염소의 뿔을 갈피에 끼워두고 나는 떠나네. 그 뿔로 이 책의 심장을 뚫고 부디 나아가게나. 행운을 비네. 베이루트 밤하늘에 떠오를 은하의 젖에 목을 축일 수 있을 때까지.

  * 칼릴 지브란의 시.

  -『문학사상』(2008. 1)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299) / 역설의 묘미 - 박강의 ‘베이루트 독서’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해설>

  이 시의 가장 큰 매력은 역설에 있다. 역설이란 진리에 반하고 있는 듯하지만 잘 음미하면 진리인 표현, 즉 본질적으로는 ‘참’이지만 얼핏 보기에는 모순ㆍ충돌되는 진술 형태다. 시인은 누구의 손때 한번 타지 않은 책을 읽게 되었는데 “성운의 젖을 빤 태양이 죽죽 밑줄을 그어놓았다”고 역설적으로 말한 뒤, “낙서족 알 무스타파는 그 밑에 이렇게 적어놓았다”고 강조해서 말한다. ‘독자들이여 분쟁지역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의 알 모스타파라는 이가 쓴 글이니 잘 읽어보시오’ 하고 부탁하면서 시가 시작되는 것인데, 마치 영화나 소설의 도입부 같다. 

  ‘낙서족’은 원래 손창섭의 소설 제목이다. 이 시에서는 ‘시 속의 낙서’를 표방, 흡사 액자소설 같은 구성법을 취했다. 알 무스타파의 낙서라는 것이 사실상 역설이다. 기상천외한 표현들은 시인 특유의 상상력의 산물인데, 상상력과 역설의 힘이 너무 강해 독자는 난감해 할지도 모르겠다. 알 듯 모를 듯한 염소 이야기가 시의 기둥축이고 그 기둥에 독자는 매달려 처형을 기다려야 한다. 

  아무튼 시는 전화(戰禍)를 입은 (또는 여전히 전쟁 중인) 도시와 광대무변한 천상의 이미지가 뒤섞이면서 일대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이 시의 애매성이 시인 자신이 책임질 일이 아니라 낙서족 알 무스파타에게 있다는 식으로 해놓은 장치가 재미있다. 제목에 대해서는 베이루트에 사는 이가 쓴 책을 시인이 읽고 일부 인용해보았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루트’와 ‘독서’가 나란히 있으므로 말이 안 되는 말, 곧 역설이다. 중동에서 전쟁은 아프가니스탄,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이라크, 이란……. 아아, 어쩜 끊이지 않는 것일까.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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