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06) / 김밥은 이런 밥이다 - 이재무의 ‘김밥’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06) / 김밥은 이런 밥이다 - 이재무의 ‘김밥’
  • 이승하 시인
  • 승인 2020.02.14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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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06) / 김밥은 이런 밥이다 - 이재무의 ‘김밥’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06) / 김밥은 이런 밥이다 - 이재무의 ‘김밥’

  김밥
   
  이재무


  김밥은 김빠진 인생들이 먹는 밥이다. 
  김밥은 끼니때를 놓쳤을 때 먹는 밥이다.
  김밥은 혼자 먹어도 쑥스럽지 않은 밥이다.
  김밥은 서서 먹을 수 있는 밥이다.
  김밥은 거울 속 시들어가는 자신의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며 먹는 밥이다.
  김밥은 핸드폰 액정 화면을 들여다보며
  먹는 밥이다. 김밥은
  숟가락 없이 먹는 밥이다.
  김밥은 반찬 없이 먹을 수 있는 밥이다.
  김밥은 컵라면과 함께 먹으면 맛이 배가 되는 밥이다.
  김밥은 허겁지겁 먹을 때가 많은 밥이다.
  김밥은 먹을수록 추억이 두꺼워지는 밥이다.
  김밥은 천국 대신 집 한 채가
  간절한 사람들이 먹는 밥이다.
  먹다 보면 목이 메는 밥이다.
  터널처럼 캄캄한 밥이다.
  바다에서 난 생과 육지에서 나고 자란
  생이 만나 찰떡궁합을 이룬 밥이다.

  ―『데스밸리에서 죽다』(천년의시작, 2020)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06) / 김밥은 이런 밥이다 - 이재무의 ‘김밥’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해설>

  김밥에 대해 이재무 시인이 내린 16가지 정의 중 내가 동의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김밥에 대한 완벽한 해설이다. 휴전선 이남에 사는 사람 중에 ‘김밥천국’에서 김밥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있다면 그는 (옛날식으로 표현하면) 북에서 내려온 간첩이다. 

  “김밥은 끼니때를 놓쳤을 때 먹는 밥이다.”나 “김밥은 서서 먹을 수 있는 밥이다.” 같은 구절에서 시인은 김밥이 서민의 음식임을 말해준다. 특히 “천국 대신 집 한 채가/ 간절한 사람들이 먹는 밥”에 이르면 자기 집 한 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상시 먹은 ‘간단한 밥’임을 더욱 확연히 알 수 있다. 체인점인 ‘김밥천국’의 사장이 이재무 시인의 이 시를 보면 기뻐할까, 불쾌하게 생각할까.

  먹을수록 추억이 두꺼워지는 밥, 터널처럼 캄캄한 밥이라는 구절에 이르면 이재무가 타고난, 혹은 탁월한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아, 나는 앞으로도 김밥을 자주 사먹을 텐데, 먹을 때마다 이 시를 떠올리게 되었다. 아뿔싸, 선수를 빼앗겼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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