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11) / 이삿날 준비를 - 안홍열의 ‘이사’
이사
안홍열
한 번 붙은 정은 쉽게 떨어지지 않아서
오래전에 이사 간 가까운 사람 얼굴이
아직 떠나지 못하고 주변에 망연히 머물러 있다
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해장국집 앞
그가 살던 아파트 근처
함께 참석했던 향우회
이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어디일까
어느 목사가
천국 가고 싶은 사람 손드시오 했더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손을 들기에
지금 천국 가고 싶은 사람 손드시오 했더니
한 사람도 안 들었다는 우스갯소리처럼
정 붙이고 사는 곳
지금 여기가 천국이 아닐까
우리 모두 여러 번 이사한 경험이 있지만
아직 이사할 곳이 한 군데 더 남아 있다
세상을 바꾸는 마지막 이사
그 때는 정을 두고 갈까 떼고 갈까
오래 아프면 정이 떨어진다고 하니
마지막 이사 날짜를 잘 잡아서
정은 두고 가고 싶다
저 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 중에 하나를 골라
내 정을 묻고 가고 싶다
―『유급 인생』(천년의시작, 2019)

<해설>
사람은 자기가 사는 동네에 정이 들게 마련이다. 편의점, 세탁소, 단골 음식점, 호프집, 분식집……. 오래 살다 보면 인사를 나누며 사는 이웃도 생긴다. 아파트 경비아저씨를 만나도 서로 인사를 한다. 산책길은 눈을 감고도 한 바퀴 돌 수 있을 것 같다. 인사를 나누던 이웃이 이삿짐을 나르고 있는 것을 보면 서운함을 느끼는데 정작 본인이 이삿짐을 싸게 되면 마음이 보통 착잡해지는 것이 아니다.
1988년에 등단한 안홍열 시인이 두 번째 시집을 냈다. 그야말로 ‘유급 인생’이다. 하지만 각 시편마다 ‘정’이 묻어나서 좋다. ‘마지막 이사’는 아마도 세상과의 이별, 즉 사별을 뜻하는 것이리라. “마지막 이사 날짜를 미리 잡아서/ 정은 두고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정’이란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이 아니랴. 애착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에 대한 정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정은 관심이다. 우리가 정붙이고 사는 곳이 바로 천국이지만 때가 되면 이사를 가야 한다. 특히 세상을 바꾸는 마지막 이사는 신중히 해야 한다. 이사의 의미에 깊이 천착한 시편이라 그런지 울림이 크다.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오는 날, 그해 들어 최고의 적설량을 보인 날이었다. 엄청난 폭설 속에서 엄청난 책 박스를 옮기면서 불평 한마디 없이 이삿짐을 날라다 준 이삿짐센터 사람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고마워서 코끝이 찡해진다. 본사에 전화를 하고 인터넷 댓글을 남겨 고마움을 표시했다. 세상살이란 정 쌓기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