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13) / 청춘을 불태우다 - 이현채의 ‘한여름 밤의 룩셈부르크’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13) / 청춘을 불태우다 - 이현채의 ‘한여름 밤의 룩셈부르크’
  • 이승하 시인
  • 승인 2020.02.21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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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13) / 청춘을 불태우다 - 이현채의 ‘한여름 밤의 룩셈부르크’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13) / 청춘을 불태우다 - 이현채의 ‘한여름 밤의 룩셈부르크’

  한여름 밤의 룩셈부르크 
  
  이현채 


  1

  로자, 고시원을 옮겨 다니며 생을 허비했어요. 스티커를 이곳저곳에 붙여 가며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늘 그 자리에 있어요. 퀵으로 내 영혼을 고향으로 보내지만, 어느새 다시 돌아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어요. 오징어처럼, 아버지의 눈썹처럼, 그리고 늙어가는 일상처럼.

  2
  로자, 한여름 밤의 룩셈부르크가 그리워요. 어제는 너무 더웠어요. 한밤의 숲에서 나무들과 동침을 했어요. 쥐들이 나의 밤을 갉아 먹어요. 나의 눈은 허공 백 미터 위로만 날아다녀요.

  로자, 나는 외로운 두 마리 새를 키워요. 이미 한 마리는 죽어가고 있어요. 나의 가슴으로 날아와 죽어가는 새를 어떻게 하지요? 당신이 독백처럼 했던 말이 허공 위에 둥둥 떠 있어요. 숲에서 광란의 아리아가 울려 퍼져요.


  3

  로자, 자본주의는 열쇠의 천국이지요. 집집마다 비밀번호가 가득하고 얼굴에 가면을 쓴 사람들뿐이에요. 

  로자, 고시원을 옮겨 다니며 생을 허비했어요. 나의 오두막에는 밤의 비밀이 있어요. 복권을 사볼까, 운세를 볼까. 나무들이 말 웃음소리를 내며 밤새 꿈속으로 녹아내려요.

  로자, 벌거벗은 한 영혼이 타입캡슐을 타고
  한여름 밤의 룩셈부르크를 꿈꿔요. 

  ―『시뮬라시옹』(한국문연, 2020)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13) / 청춘을 불태우다 - 이현채의 ‘한여름 밤의 룩셈부르크’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해설>

  제목에 나오는 룩셈부르크가 유럽에 있는 작은 나라의 이름도 아니고 그 나라의 수도 이름도 아님을 시의 본문 첫 글자를 보고 알았을 것이다. 이 시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시집 『시뮬라시옹』에는 로자를 염두에 두고 쓴 시가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 아마도 이 시집은 그녀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사가 아닐까. 무한한 존경심을 갖게 한 인물, 그녀를 생각하면서 시인은 어려운 날을 견뎌냈던 것이리라. 다음백과의 생애 요약을 보자.

  폴란드 출신의 사회주의 이론가ㆍ혁명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하운동에 참여했으며, 국제사회주의 운동에 관여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을 도왔으며 베른슈타인과 수정주의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1905년의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바르샤바에서 혁명투쟁에 동참했으나 체포되었다. 이때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가 승리하는 데 대중운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혁명을 통하여 전쟁 종식과 프롤레타리아 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스파르타쿠스단을 조직했고 1918년 독일 공산당을 창설했다. 1919년 1월 스파르타쿠스 폭동 때 우파 민병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화자와 시인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인이 그녀를 추앙하고 본받으려고 했음을 “로자, 나는 화가예요./ 당신만을 그리는 화가예요./ 나의 시간 속에는/ 당신의 혁명이 가득해요.”(「로자주의자」) 같은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로자를 존경하는 화자는 분연히 말한다. “자본주의는 열쇠의 천국이지요. 집집마다 비밀번호가 가득하고 얼굴에 가면을 쓴 사람들뿐이에요.”라고. 

  로자의 자본주의 비판은 옳았지만 그녀가 꿈꾸었던 공산주의 세상은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기 것을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하지 절반을 뚝 떼어 남에게 주려고 하지 않는다.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분배한다? 내 것이 안 생기는데 누가 일을 열심히 하는가? 

  고시원을 옮겨 다녔고 애정을 갖고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생활이 별로 나아지지 않았던 것일까. 생의 힘겨움이 로자 룩셈부르크를 굳건하게 했을 것이다. 시인을 강건하게 했을 것이다. 생을 허비한 것이 아니다. 한여름 밤에 사람들은 축 늘어져 있지만 시인은 실재가 가상 실재로 전환되는 일을 해냈다. 시로써 말이다. 외롭지만 희망을 튼튼히 재현해냈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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