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14) /시집의 용도 - 김광희의 ‘시인이 별거라고’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14) /시집의 용도 - 김광희의 ‘시인이 별거라고’
  • 이승하 시인
  • 승인 2020.02.22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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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14) /시집의 용도 - 김광희의 ‘시인이 별거라고’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14) /시집의 용도 - 김광희의 ‘시인이 별거라고’

  시인이 별거라고 
  
  김광희


  해마다 농사지어 찹쌀을 주는 친구
  주는 시집 마다하고 인터넷서 사서 읽고
  고맙고 자랑스럽다고 사인 값으로 밥 사준다

  이마빡 벗어질까 염치는 있어갖고
  사과 한 짝 들고 갔다가 못 볼 걸 봐 버렸다
  장롱 짝 받치고 누워 힘쓰고 있는 내 시집

  나 대신 고생 많다 오래도록 힘 좀 써라
  엎드려 지은 햇곡 목 메이게 받아먹고
  덕분에 열심히 써야지 내 할 일이 별거겠어

  ―이목시조동인지 제2집『화첩을 찾다』(목언예원, 2019)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14) /시집의 용도 - 김광희의 ‘시인이 별거라고’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해설>

  제2연의 반전이 재미있다. 화자의 친구가 센스 있고 후덕하여 덩달아 고마워하고 있었는데 웬걸, 사인을 해준 시집이 그 집 장롱의 균형을 맞추는 데 쓰이고 있다니. 사람이 공짜를 좋아하면 안 되는데, 그래서 사과 한 짝을 들고 갔다가 그만 못 볼 것을 봐 버렸다. 아, 하필이면 그 시집으로!

  제3연 또한 반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 친구가 엎드려 지은 햇곡을 내 목 메이게 받아먹지 않았나. 찹쌀을 먹고 차지게 작품 쓰는 것이 내가 할 일, 그럼 되는 거지 뭐 하고 마음을 달랜다. 시조 작품이 대체로 너무 점잖은데 이 작품은 시종 해학이 있어 좋다. 

  고려원이라는 큰 출판사가 부도가 나서 문을 닫았다. 그 출판사에서 낸 내 시집이 다른 책들과 함께 길거리에 ‘고려원 도서 방출 대세일’이라는 광고 아래 할인가로 팔리고 있었다. 주변을 힐끔힐끔 살펴보다가 얼른 ‘몽땅’ 산 적이 있다. 창피해서 혼났다. 

  80년대 한때 대학가에서는 포커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후배들이 시집 내기로 판을 벌인다기에 현장을 급습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내 시집이 판돈이 되어 있었다. 호통을 쳤더니 내 시집만은 걸지 않기로 했다나. 아아, 시집의 운명이여. 시인의 명줄이여.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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