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16) / 고마움과 미안함 - 장순금의 ‘봉순이’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16) / 고마움과 미안함 - 장순금의 ‘봉순이’
  • 이승하 시인
  • 승인 2020.02.24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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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16) / 고마움과 미안함 - 장순금의 ‘봉순이’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16) / 고마움과 미안함 - 장순금의 ‘봉순이’

  봉순이
  
  장순금


  똥그란 얼굴에 손끝이 매운 봉순이는 열여덟에 전라도 깡촌에서 우리 집으로 왔다 이뿐 동생처럼 우리를 둘러앉혀 고구마와 찐빵 국수도 금방 말아준, 몸은 부엌에 있어도 눈은 우리에게 있었던 엄마보다 더 엄마 같았던 열여덟 살 봉순이, 오지랖 넓은 우리 할머니 길가는 이 오며 가며 불러들여 밥 먹이고 싸주고 객식구 북적대는 우리 집 일거리 너무 많아 보따리 싸서 가버린 봉순이, 부엌이 휑해졌는데 밥그릇에 온기가 달아났는데 한 번도 언니라 부르지 못해 가고 난 후에야 혼자 말한 언니가 입 속에 오래 남았다 십년도 지난 어느 날 이사 간 집 찾아온 봉순이. 우리가 보고 싶어 왔다는 말에 심장에 쿵, 뜨거운 소리 어린 날 남의집살이, 주인집 아이들이 보고 싶어 왔다는데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내가 너무 작고 부끄러워 마음이 저절로 구부러졌다 추운 세상에 숨은 꽃이 환히 고개 내민 것 같았다 봄의 체온이 전해왔다 언니란 말이 오래 얹혀 뒤늦은 그리움에 언젠가 만나면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고봉밥 한 끼 꼭 지어주리라 별이 소복한 따뜻한 밥을

  ―『얼마나 많은 물이 순정한 시간을 살까』(시산맥, 2020)

 

  <해설>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계발 5개년계획을 발표하며 산업화를 위해 발벗고 나선 것은 60년대 중반부터였다. 그는 공업입국(工業立國)을 부르짖으며 서울 구로동ㆍ포항ㆍ울산ㆍ마산ㆍ창원ㆍ구미 등에 공업단지를 만들면서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주었고, 나중에는 중동에도 많은 건설인력을 보냈다. 독일에도 광부와 간호사를 보냈다. 그래서 농촌의 총각들은 도시로 나가 취직을 했는데 여성들에게는 그만큼의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공장 노동자와 버스 차장, 찻집의 여급 같은 것을 했지만 전국적으로 많은 시골 출신 여성이 중학교를 마친 이후 시집 갈 때까지 취직할 만한 곳이 마땅히 없었다. 그 시절, 많은 여성이 입주 가사도우미를 했는데 그들에게 붙여진 이름이 ‘식모’였다. 인격비하의 의미가 있었지만 그때는 그런 인식을 하지 못했는지 다들 그렇게 불렀다. 

  이 시는 봉순이라는 인물에 대한 추억담이다. 열여덟 살에 전라도 깡촌에서 온 봉순이는 집안 식구들 뒤치다꺼리만 해도 힘든데 객식구가 북적대자 감당을 할 수 없어 결국 보따리를 싸 가버렸다. 십년도 더 지난 어느 날 봉순이가 이사 간 집을 어떻게 수소문해 찾아왔다. 주인집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왔다는 것이다. 시의 화자는 그 전에도 그때도 ‘언니’라고 부르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다시 만난다면 따뜻한 고봉밥이라도 사 드리고 싶다는데, 그날이 과연 올 수 있을지.

  이 시가 내 마음을 끈 것은 봉순이의 착한 마음씨다. 봉순이는 주인집 아이들에 대해 고마움과 미안함을 계속 갖고 살았던 것이고, 그래서 찾아온 것이 아니랴. 이런 마음을 우리는 ‘정(情)’이라고 한다. 정이 별로 없는 시대여서 그런지 봉순이의 착한 마음이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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