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17) / 저 생활의 근력들 - 염창권의 ‘거미집’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17) / 저 생활의 근력들 - 염창권의 ‘거미집’
  • 이승하 시인
  • 승인 2020.02.25 22:27
  • 댓글 0
  • 조회수 214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17) / 저 생활의 근력들 - 염창권의 ‘거미집’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17) / 저 생활의 근력들 - 염창권의 ‘거미집’

  거미집 
  
  염창권


  저 아주머니, 
  허공에 거미집을 지었다 
  시든 배춧잎 같은 발자국들이 
  황망하게 돌아서는 
  말바우 시장의 파장 무렵 
  성글게 비어져 나와 
  허공에 걸리는 머리카락들 
  고무밴드를 입술에 지그시 물고 
  갈퀴처럼 손가락으로 훑어 내리면서  
  파마 기운 풀린 머리칼을 헤치자 
  가는 올 가닥 가닥마다 석양빛이 걸린다 
  철사보다 강하게 
  허공을 버팅기는 저 생활의 근력들, 
  허공이 거미줄에 걸려 버둥거린다 
  부유하는 시간들이 
  눈썰미 곱게 내려앉는다  
  그 기운을 알아채기라도 하듯 
  고무밴드로 후려잡아 질끈 동인다   
  그러나 머리에 인 함지박 밑으로 
  짧게 비어져 나온 머리칼이 있어 
  역광으로 희게 부서진다  
  함께 동여 버릴 수 없는 것들이 
  마침내 바람 속에 몸을 부실 때는 
  눈이 시리다 
  내 동창이었던 여자, 
  전봇대 쪽 골목을 돌아가서 
  아주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밤의 우편취급소』(한국문연, 2020)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17) / 저 생활의 근력들 - 염창권의 ‘거미집’ [이미지 편집 = 김보관 기자]

  <해설>

  저 아주머니, 자세히 보니 화자의 동창생이다. 온 시장이 썰렁해지고 있는 파장 무렵, 그녀는 “머리에 인 함지박 밑으로/ 짧게 비어져 나온 머리칼”을 “고무밴드로 후려잡아 질끈 동인다”. 여자동창은 삶의 현장에서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아낙이 되었고 화자와 시인을 동일시한다면 남자동창은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그녀는 눈부시다. 머리칼은 역광으로 희게 부서지고, “전봇대 쪽 골목을 돌아가서/ 아주 보이지 않을 때까지” 주시하는데, 눈이 시리다고 한다. 

  그녀의 생활력을 시인은 거미가 허공에 거미집을 짓는 것으로 비유했다. 이 시에서 가장 빛나는 표현은 “부유하는 시간들이/ 눈썰미 곱게 내려앉는다/ 그 기운을 알아채기라도 하듯/ 고무밴드로 후려잡아 질끈 동인다”이다. 어떻게 거미집을 쳐 왔는지 한눈에 알게 하는 행위가 바로 입술에 물고 있던 고무밴드로 머리카락을 후려잡아 동여매는 그 멋진(?) 행위인 것이다.    

  얌전한 스타일인 시인의 성격으로 보건대 이 시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충격과 감동을 함께 느꼈을 것이다. 우리처럼 매가리 없이 살아가는 남자는 그녀의 ‘생활의 발견’을 보면 존경심을 갖게 된다. 주눅이 팍 든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