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25) / 당신이 잠든 사이에 - 금란의 ‘수면내시경’
수면내시경
금란
침대 위에 빈 몸을 널어놓은 채
잠시 지구 반대편으로 여행을 떠난다
나를 밀어냈던 얼굴들이 흔들렸다 사라진다
고깃덩이로 누워있는 몸속을 샅샅이 훑고 지나가는
바람의 소리를 어렴풋이 들은 듯하다
물속 들여다보듯 내 속을 빤히 보고 있는 저들
동백꽃 같은 혹이 자라고 있지는 않을까
몰래 삼켜 버린 꽃씨 하나가 알 수 없는 자리에서 꽃을 피우고
화면 가득 붉은색으로 물들 때
가장 짧은 천국의 거짓말을 알게 될 것이다
사과 속 벌레가 사과를 검게 하듯
소화되지 못한 혹의 침묵이 장기에 그늘을 드리우고
나를 날마다 갉아먹고 있는 위독한 침묵을
생의 절반을 계단 모서리를 접으며 살고 싶지 않는
눈꺼풀이 모르게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른다
일어나세요
금속성의 말이 귀에 부딪힐 때
나는 가장 캄캄한 우주를 헤매고 있었다는 거다
―금란, 『얼굴들이 도착한다』(파란, 2019)

<해설>
일반내시경은 고무관이 목구멍을 넘어 위와 장까지 들어가기 때문에 고통을 여간 혹독하게 겪는 게 아니다. 그런데 수면내시경은 잠을 자는 동안에 위와 장을 기계가 다 들여다보기 때문에 별다른 고통을 겪지 않는다. “침대 위에 빈 몸을 널어놓은 채/ 잠시 지구 반대편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표현이 아주 정확하다. 사람이 마취를 당하면 순식간에 딴 세상으로 간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내 몸은 내 관할 하에 있지 않다. 내 구역 내에 있지 않다. 타인의 의지에 의해 관찰의 대상이 될 뿐이다.
내 몸속을 들여다보면서 의사들은 혹을 떼야 할지 그냥 둬도 될지 결정할 것이다. 이 시의 재미있는 부분은 수면내시경이라는 상황을 가져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화자가 잠든 사이에 이루어진 일을 갖고 “가장 짧은 천국의 거짓말”, “나를 날마다 갉아먹고 있는 위독한 침묵”, 그리고 일어나라는 말을 “금속성의 말”이라고 표현한 표현의 신선함에 있다.
수면내시경은 환자를 완벽한 침묵의 공간으로 데려가고 의사들은 농담도 하면서 사람의 신체를 들여다볼 것이다. 화자가 가장 캄캄한 우주를 헤매고 있는 시간에 의사들이 과연 무슨 말을 했을까? 이 친구 살 좀 빼야겠네. 가슴이 무척 크군. 물론 이런 말은 하지 않았겠지만 화자는 알 수 없다. 다른 세상에 갔다 왔으므로.
수면내시경이 끝나고 의식이 돌아왔다. 나는 눈물과 침을 흘리고 있었다. 금란 시인도 그런 경험을 했나보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