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영의 걷다가 만난 사람들] 강호초출의 시장 종횡기
[신지영의 걷다가 만난 사람들] 강호초출의 시장 종횡기
  • 신지영 소설가
  • 승인 2020.03.31 0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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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다가 가끔 느끼는 것이 있다. 우리가 사는 강호에는 알려지지 않은 기인이사들이 구름과 같이 많다는 것을. 내가 종종 걷는 시장도 그렇다. 시장 안에는 두 거대 문파가 있다. 바다를 근거로 하는 문파와 대륙을 품은 문파라고 할 수 있겠다. 각 문파에 속한 검객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서로의 초식을 자랑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두 문파 공히 검법을 운용하기 위한 내공이 뜨거운 열기를 바탕으로 하는 열양공이 아니라 차가운 기운을 근본으로 하는 한빙공이라는 점이다. 차가운 기운이 유지되지 않으면 그들의 무공은 평소에 비해 급격히 약해진다. 하지만 언제나 수는 있는 법. 그들이라고 이 약점을 모를 리 없다. 그래서 그들의 거점에는 24시간 차가운 기운을 공급하는 만년한옥으로 만든 냉동고가 있다. 가끔 그들의 거점 근처에서 들리는 웅웅거리는 소리는 만년한옥이 냉기를 생성하고 주변으로 품어 내는 소리다. 냉동고가 있는 한 그들의 검법은 언제나 최상의 솜씨를 유지한다. 그들에게 냉동고는 온갖 기화요초보다 더한 보물이다. 

   하지만 내공의 뿌리가 같다고 해도 그 운용은 문파마다 조금씩 다르다. 대륙을 품은 문파는 냉기를 주로 기체 형태로 운용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점 앞에 내부가 비치는 유리로 된 진열장을 만들고 대륙의 곳곳에서 생산된 고기를 멋진 솜씨로 각각의 부위로 다듬어 진열한다. 이후 고기의 선도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허연 김이 서릴 정도의 차가운 기운을 내뿜는다. 명가의 실력과 서늘한 한기 앞에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가졌다 하더라도 어쩔 도리 없이 지갑을 여는 것이다. 

   반면 바다를 근거로 하는 문파들은 자신들의 내공을 기체 형태가 아닌 고체 형태로 운용하는 것을 즐긴다. 이는 그들이 다루는 품목이 열기에 더 취약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거점 주변에 슬쩍 닿기만 해도 살을 에는 것 같은 얼음들이 도처에 깔려 있는 까닭이다. 특히 여름은 이들에게 위기의 계절이라 수시로 얼음을 보충해야 한다. 잠시 한 눈이라도 팔게 되면 문파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이들의 세심함은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강호를 떠도는 낭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어 항상 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다. 

전솔이 그림
전솔이 그림

   지난여름의 일이다. 절정의 더위가 온 시장 안을 꽉 메웠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흥건하고 바람마저 끈적였다. 이럴 때는 시장의 상인들도 시장을 찾는 사람들도 더위와의 싸움에서 쉽게 손을 들어버리고 만다. 조그마한 일에도 짜증이 밀어닥치고 마음이 폭발해 버리는 일이 다반사이다. 경험에서 지혜를 깨우친 노강호들은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그늘에 앉아 마음을 다스리지만 그 또한 밀착된 공간 때문인지 다른 이들의 싸움에 휘말리는 게 빈번하다. 그날도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무언가를 사기위해 좁은 시장 골목에 들어찼다. 습도는 올라가고 말끝에도 땀이 떨어질 것 같았다. 모두들 날카롭게 곤두서 각자의 일을 보는데 한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술 취한 남자가 상인들의 가게마다 시비를 거는 거였다. 등치가 크고 험한 말투 때문인지 누구도 쉽게 말리지는 못했다. 야채가게의 야채들을 발로 차고 전집의 전들을 집어던지고 있는 대로 욕지기를 해댔다.

 “내가 왕이야! 손님이 왕이야! 왜 이렇게 불친절해!”
 “아이고, 아저씨, 여기서 이러면 안돼요. 좀 진정해 봐요.”
 주정을 부려대는 남자를 말려보려 상인들이 어르고 달래봤지만 화만 더 돋우었는지 행패가 더 심해졌다.
 “아저씨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가잖아요. 좀 조용히 해요.”
 “이게 어디서 선생질이야. 너나 닥쳐!”

   지나가던 아줌마가 보다 못해 한 마디 하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주먹을 쥐고 휘두르려했다. 놀란 아줌마가 걸음을 빨리하며 사라지자 남자는 신이 난 건지 힘이 난 건지 시장 안을 다 휘저을 기세로 더 난리를 쳤다. 비틀대고 걸으며 과일 가게를 지났을 때였다. 드디어 생선가게와 정육점이 마주보고 있는 길에 발을 디뎠다. 양 가게의 검객들은 묵묵히 자신들의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소리가 귀에 닿자 둘이 동시에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순간 그 남자도 뭔가를 느꼈는지 양 쪽 가게를 번갈아 쳐다보며 두 검객과 눈이 마주쳤다. 검객들은 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자리에서 남자를 엄격히 바라보았을 뿐이다. 남자는 잠시 주눅이 든 듯 멈칫하더니 객기가 도졌는지 다시 삿대질을 하려 팔을 들려 했다. 순간 한 검객이 긴 갈치의 대가리를 쿵 소리가 나게 쳐내었다. 대가리가 툭 남자의 발 앞까지 굴러 떨어졌다. 동시에 다른 검객이 붉은 고기 한 덩이를 날이 선 칼로 턱턱 쳐 내려갔다. 남자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삿대질을 하려던 팔을 얌전히 내렸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시장 밖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각자의 일을 보았다.

   두 문파의 검객들은 자신들이 뿜어낸 내공을 다시 안으로 갈무리하며 본연의 작업으로 돌아갔다. 시장 골목의 법도를 알지 못한 낭인 한 명이 저지른 소동은 고수들의 눈길 한 번으로 가볍게 정리되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강호는 넓고 깊어 그 끝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을.

 


● 이 글에 나오는 무공에 관한 단어는 방구석에서 귀식대법을 펼치며 자신이 은거기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음을 밝힙니다.

 

신지영
소설가.
2009년 푸른문학상 ‘새로운 작가상’, 2010년 푸른문학상 ‘새로운 평론가상’, 2011년 ‘창비 좋은 어린이책’ 기획 상을 받은 뒤, 동화와 청소년 소설을 활발하게 집필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퍼펙트 아이돌 클럽》,《안믿음 쿠폰》,《너구리 판사 퐁퐁이》(공저),《어린이를 위한 통계란 무엇인가》(공저)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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